설교

아담처럼? 그리스도처럼?

강원용 목사의 사진이 영사된 20주기 추모식 예배 공간

1.

어제, 경동교회에서 여해(如海) 강원용 목사님 20주기 추모 모임이 있었습니다. 유감(有感) 한 마디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여해(如海)는 1993년 ‘빈 들에서’에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당신은 정치가요? 아니요. 당신은 사회운동가요? 아니요. 당신은 성직자요? 아니요.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 나는 빈 들에서 외치는 소리요.”

강원용 목사의 사진과 ‘빈 들에서 외치는 소리’라는 글이 실린 책 표지

추모식은 온통 칭송의 말로 채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그는 칭송받을 만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뛰어난 분이 맞습니다. 미래에 대한 예지 능력도 있었고,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데 탁월한 감각이나 능력도 빼어나며 강력했습니다. 대중을 휘어잡고 이끄는 카리스마도 남 달았습니다. 달변(達辯)이요, 정곡을 찌르는 대화술의 달인이었습니다. 그래요, 그렇다고 해서, 20주기를 추모한다며 ‘찬양 일색’의 추모는, 여해(如海)의 기대는 아니었을 것, 그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것으로, 그의 속마음을 공감(共感)하지 못한 것으로 내게는 보였습니다. 그는 목사입니다. 목사로 ‘빈 들(廣野)의 소리’이길 바랐습니다. 이 말은 여해(如海) 강원용 목사님이 자기를 표현한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여해(如海)는 왜? 세례 요한처럼 되길 스스로에게 말했을까요? 주님 앞에서, 겸손해야 할 자신을, 자신에게 다짐한 것입니다. 이 마음을 읽어내야, 이 마음을, 공감(共感)해야, ‘강 핏대’로 불린 강 목사님을 이해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는 자신이 뛰어난 사람임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았습니다. 동시에, 이 뛰어남, 번득이는 천재성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자신이 높아질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가 ‘빈 들의 소리’를 마음에 꼭꼭 담아둔 이유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 교만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를 ‘빈 들의 소리’까지로 둔 것입니다. 여해(如海)가 살아계셨다면, 이 자리에서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답답하다”라고 답답함을 토로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목소리 톤을 높이면서 “날 모르겠어? 내가 이런 칭송을 바란 것 같아? 정신 차려!” 하며, 자신의 길에 공감(共感)하지 못함을 나무랐을 것 같습니다. 만약 내게 한 마디 하라는 기회를 준다면, ‘빈 들의 소리’를 자기라 한 “여해(如海)의 마음을 공감(共感)하자.” 라고 할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요 1:23)라 하면서 “나는 내 뒤에 오시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요 1:27)라 한 겸손을 읽어주길 바란다고 했을 것입니다. 당시 요한은 대중적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예언자였습니다. 예수께서도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마 11:11)라 했습니다. 여해(如海)의 마음을 공감(共感)하는 것, 이것이 올바른 추모가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추모행사를 마치고 난 느낌 ‘아쉬움’을 한 마디 했습니다.

2.

지난 주일(8월 16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6월 11일에 쓴 ‘평(平)’이란 시를 읽었습니다. “평화(平和), 평안(平安), 평등(平等), 평(平)자(字)를 입속에서 오물, 오물 오글거리다.” 세상을 보면서, 평화(平和)롭지 못하구나, 사람들의 삶이 평안(平安)하지 못하구나, 세상이 평등(平等)하지 못하구나, 하는 생각으로 불편한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온 세상 사람이 평화(平和)로운 세상을 꿈꾸고 꿈꾸면서, 현실은 반대의 세상을 만들고 있을까요? 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이 평안(平安)하길 원하는데, 불안(不安)할까요? 왜? 사람은 모두가 평등(平等)해야 하는데, 현실은 셀 수 없는 계층으로 형성되어 불평등(不平等)할까요? 질문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사도 바울의 아담과 그리스도에 대한 로마서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3.

바울의 아담과 그리스도 비교는, 죄와 구원의 문제를 다룬 본문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죄가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들어왔다고 하여, 창세기 3장의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을 인용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뜻에 순종한 십자가(十字架)는 죄 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뿐이라 했습니다. 로마서 6:1~9을 보면,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롬 6:2),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와 함께 장사 되었고,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신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으려 함이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살 줄 믿는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않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한다.” 했습니다. 죽음(사망)에서 자유하는 구원은 예수를 믿는 것, 아담이 불순종으로 가져온 사망을 이기는 유일한 길임을 증언하는 바울의 말씀입니다.

4.

그런데 나는 오늘 바울의 본문, 심오(深奧)한 원죄를 다루며,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에 대한 신학적 해석 측면에서 본문을 보지 않고, 바울의 또 하나의 목적, 신앙적 가르침에서 헤아려 보려 합니다. 나는 바울이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다른 한 편,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사람을 향해, 이 질문을 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 너는 세례로 그리스도와 합하여 하나 되었다. 그렇다면 너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느냐? 아담처럼? 당연히 아니지! 그래, 그렇지. 그리스도처럼 이지!” 이런 요구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5.

아담은 어떤 삶을 보여줬을까요? 창세기가 증언하는 아담의 삶이 알려진 것은, 에덴동산 안에서의 삶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동행했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여 데려온 동물들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외로웠습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죠. 어느 날, 하나님은 아담의 짝으로 지어주신 하와를 데려왔습니다. 하와와 아담은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이 나무 열매는 하나님께서 “죽는다”하며, “먹지 말라” 한 열매였습니다. 이때부터 사람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불순종으로 죄와 사망이 들어왔고, 남자와 여자 사이가 불안(不安)이 들어오고, 땅과 불화(不和)하게 되고, 땀 흘려야만 일용할 양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평안(平安)과 평화(平和)가 깨졌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 지혜의 나무라고도 합니다.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판단하고 심판하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선(善)이야, 이것이 악(惡)이야.” 판단하는 하나님의 고유 영역을, 사람이 행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생명나무 열매는 하나님의 권한에 두어야 했기에,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했습니다. 자, 선악과 먹은 사람, 아담의 후예(後裔)는 어떻게 살게 되었습니까? 인류의 역사를 보십시오. 내가 선하다. 내 생각이 옳다. 내 판단이 법이다. 나를 따르라. 그 기준이 선악을 분별하는 것에서 할 수 있는 것인데. ‘하나님같이 됨’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것입니다. 문제는 선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된 그것을, 사람은 어떻게 사용합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을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고 봅니다. “너 죽고 나만 살자.” “나 죽어 너 살라.” “다 함께 살자.” 이런 시각으로 아담의 삶을 표현한다면, “너 죽고 나만 살기”이고, 그리스도의 삶은 “나 죽어 너 살리고, 다 함께 살기”가 됩니다. 인류가 만들어 온 삶은 “너 죽고 나만 살기”로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사망’을 가져오는 삶은 어떤 것입니까? 죽임으로, 평화(平和). 평안(平安). 평등(平等), 살림은 없습니다. 전쟁, 폭력, 분열, 파괴, 부정, 부패, 거짓, 불신, 미음, 증오, 복수, 질투, 폭언, 거짓,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죄짓고 타락한 아담의 삶이라 한다면, 평화(平和), 평안(平安), 평등(平等). 살림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삶은, 윤동주의 시에서처럼, 하늘(하나님) 향해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글자 풀이를 해 보았습니다. 평화(平和)의 화(和), 평안(平安)의 안(安), 평등(平等)의 등(等) 자(字)에서 찾아봅니다. ① 평화(平和)는 화평(和平)으로 이룹니다. 화(和)자는 ‘쌀’ 화(禾) 변에 ‘입’ 구(口)입니다. 쌀을 사람의 입에 골고루 나눕니다. 공산주의(共産主義)식으로 억지로, 똑같이 나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국가가 힘으로, 권력을 휘둘러 독점해서 공산(共産), 공분(共分)하는 것은 Pax Roman의 변형 일 뿐입니다. 빼앗아 나눔이 아닙니다. ‘함께 살기’입니다. 여기에는 자연스럽게 욕심의 유혹을 물리칩니다. ② 평안(平安)의 ‘편안’ 안(安)자는 ‘지붕, 움’ 면(宀)자 안에 ‘계집’ 녀(女)입니다. 집안에 여자(女子)가 안전(安全)하게 보호받는 글자입니다. 녀(女)는 모든 사람의 어머니(母)입니다. 자궁(子宮), 곧 생명(生命)의 씨를 품은 어머니입니다. 모든 사람의 생명을 안전(安全)하게 보호하는 것이, 진정한 평화(平和)입니다. 시편 121편은 하나님은 보호하시는 분이라 고백하며 노래합니다. “눈을 들어 산을 보라. 나의 도움이 어디에서 올까?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 서로다.”(시 121:1~2) 모든 환란에서 지키시는 하나님처럼 안전(安全)하게 보호하는 곳에 평안(平安)이 존재합니다. ③ 평등(平等)의 ‘무리’ 등(等)자는 ‘풀’ 초(艸) 아래에 ‘절’ 사(寺)자입니다. ‘사’(寺)는 ‘절’, 종교(宗敎)를 말합니다. 기독교식으로 표현하면 ‘교회’가 절(寺)에 해당합니다. 교회가 백성(艸)을 떠받들어야 합니다. 종교가 민(民)을 섬기려면 겸손히 낮아짐으로 행합니다. 그런데 종교가 백성 위에서 권세를 부리면, 평등(平等)은 소멸되고 질식합니다. 종교가 높아지면, 종교가 아니라 우상(偶像)입니다. 백성이 종교(寺)를 떠받드는 행태를 보인 곳이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艸)을 죄인 만들어 속박되게 한 곳, 그래서 예수님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마 21:13)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성전은 무너져야 하고, ‘에클레시아’, 민(民)을 종교(寺)가 높이는 그리스도교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소리친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삶에 화(和), 안(安), 등(等)이 사라졌습니다. 그 결과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여(창 6:5), 하나님께서 땅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고 마음에 근심하게(창 6:6) 된 ‘노아 시대’가 된 것입니다. 선악과 따먹은 이후의 아담은 평화(平和)가 없습니다. 아담의 삶은 화(和) 대신 독점(獨占), 안(安) 대신 지배(支配), 등(等) 대신 권위(權威)를 택했습니다. 이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너 죽고 나만 살자”입니다. 여기에 구원이 있을 리 없습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까요? 우린 무엇을 선택해야 합니까?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처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셨지만, 그 자리를 비워 우리를 섬기기 위해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의 낮아지신 그리스도 고백입니다. 폭력, 군림, 파괴로 주먹 쥔 손을 펴서, 편 손으로 섬김, 높임, 품음, 나눔으로 이룰 평화(shalom)를 이루신 것입니다.

6.

자, 여기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을 묻습니다. 너 자신이 목사로서 보여주는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어떤 것들이 주님의 교회를 풍성하게 할까요? 분열을 획책하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언사(言事)를 행하는데, 성도들이 자기 자리를 지킬까요? 소크라테스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목사, 교회는 늘 아담이냐? 그리스도냐? 라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비춰봐야 합니다. 나를 내놓아 주님의 교회를 살릴 때, 다 함께 사는 평화(平和)를 얻게 됩니다. 사탄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담긴 평화(平和)를 태생적으로 싫어합니다. 그래서 마귀 추종자를 만들어 방해합니다. 자신을 바울의 말씀으로 진단해 보길 바랍니다.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롬 6:11) 되기 위해 제시한 가르침을 새겨야 합니다.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몸의 사욕에 순종 말라.”(롬 6:12)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이렇게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면, 우리는 “법(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롬 6:14) 있는 “거룩함에 이르게”(롬 6:19) 됩니다. “그 마지막은 영생”(롬 6:22)입니다. 올바른 믿음의 신비요, 은혜요,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깁시다. 그리스도의 섬김을 행합시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이룹시다. 혹시 내 안에 머물러 똬리 틀려 하는 아담의 흔적이 있는지 잘 살펴, 오직 그리스도 예수처럼 공감(共感)하며 살아, 이 세상에 평화(平和)와 평안(平安)과 평등(平等)을 이루어 가는 한 사람이 되길, 기원합니다.


축복기도

평안(平安)하지 못하고, 평등(平等)하지 못하고, 평화(平和)롭지 못한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한 바울의 말씀으로 깨닫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지금은 평화(平和)의 주로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이 세상이 참으로 평화(平和)롭기를 바라시고, 평안(平安)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하심과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모든 사람이 평등(平等)한 평화(平和)를 함께 누리도록 도와주시는 성령의 감동, 감화, 위로하심이 이 세상에 고통당하고, 소외당하고, 억울한 아픔을 가진 이들을 기억하시며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해지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강석찬 목사

물방울이 맺힌 연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