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고 싶은 설교
공감 능력 충만한 복음
- 등록일
- 2026년 8월 18일
- 설교일
- 2026년 8월 16일
“공감 능력 충만한 복음”
사 4:2-6; 빌 2:12-18; 마 5:13-16.
삼일교회 2026. 8. 16. 설교
앗시리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미 멸망시켰고, 이어서 남왕국 유다를 멸망시키기 위해 포위하고 있을 때입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때에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소명을 주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사 4:3)
하나님께서는 비록 나라가 망할지라도, ‘남은 자들’ 즉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을 정화시켜서 잃어버린 예루살렘의 영화를 되찾게 하겠다고 언약하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비통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비참해진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남은 자들을 통해서 살 길을 열어주신다니 감사하기 이를 데 없는 일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그처럼 기대하신 “남은 자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그 뒤 저들의 모습을 예언자 에스겔이 증언한 기록이 있습니다.
앗시리아를 뒤이은 바빌론이 1만여 명에 달하는 지도층 사람들이 바빌론 포로로 끌려갔는데(BC. 587-582), 그 뒤 예루살렘은 무법천지가 됩니다. 죄악의 소굴이 된 것입니다(겔 22:2).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은 포로로 끌려간 동포들에 대해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반기는 자들까지 있었습니다. 서로 그들이 두고 간 재산을 차지하려고 혈안이었습니다. 당시 에스겔은 너무 큰 충격을 받고, 이처럼 흉악한 자들은 용광로 속의 쇳물처럼, 고통과 시련을 겪은 뒤에야 하나님의 희망을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릅니다.
사실 이사야가 하나님께로부터 예언자의 소명을 받을 때는 남왕국 유다의 국력이 쇠잔해 있었던 건 아닙니다. 문제는 나라의 겉모습은 그랬는데, 속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해서 시시각각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 것을 이사야는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라가 망해서 폐허가 될지라도 살아남은 자들을 정화시켜서 잃어버린 영화를 되찾게 하겠다고, 희망의 말씀을 하신 것인데, 실제로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은 역겨울 정도로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짝사랑하셨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기대했던 “남은 자” 사상이 오늘 빌립보서 사도 바울의 말씀에도 나타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로마에 수감된 사도 바울은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이 될 것임을 예감하고, 목자 없이 남겨질 빌립보 교인들에게 유언처럼 남기신 말씀입니다. 문제는 말씀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원을 너희에게 두고 행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담아두신 당신의 소원 즉 하나님의 마음과 얼마만큼 공감하여 행하느냐 입니다. 저 옛날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결코 만만한 게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침팬지를 예로 듭니다. 침팬지는 서열 높은 우두머리가 서열 낮은 놈들을 지배합니다. 인간에게도 그런 서열 의식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침팬지와 달리 자기 성찰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성찰 능력을 발달심리학에서는 ‘메타인지능력(metacognition)’이라고 합니다. 공감 능력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침팬지처럼 서열 의식은 높은데, 메타인지능력이 없거나, 낮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침팬지와 다를 바 없이 행동합니다. 강자에게는 비굴하고 약자는 사정없이 물어뜯습니다. 그가 하는 그럴듯한 말들은 무슨 의미가 있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우두머리로 위세부리기 위해 내뱉는 말입니다. 자기 잘못을 사과하는 법이 없습니다. 불가피 책임을 진다면 아랫것들에게 지웁니다. 매사에 지고는 못 삽니다. 자기보다 더 전문가는 없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우두머리 자체가 진리입니다. 이런 우두머리 밑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조건 충성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비극적인 것은, 침팬지를 닮은 우두머리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 능력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반대당이나 비판적인 시민사회단체는 쳐내야 하는 ‘반국가단체’이지 협력해야 할 동반자가 아닙니다. 민주국가는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등 삼권분립으로 서로 견제하는 제도를 가지고 있는데, 침팬지 닮은 우두머리는 이걸 다 무시해 버립니다. 수많은 독재자들, 고문기술자들, 살인마들이 모두 그런 유형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당신의 소원을 담아두신 것은, 침팬지가 아닌 인간으로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사회 안의 약한 자들, 희생자들, 그리고 억울한 이들과 공감하여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죄악은 그 반대의 길로만 달립니다.
예컨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은 불세출의 인물입니다. 통일왕국을 건설함으로써 불후의 업적을 남긴 왕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저지른 죄악은 참으로 끔찍합니다.
(삼하 13장)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다말이라는 누이동생이 있습니다. 이 다말을 배다른 큰 오라비 암논이 사모했으나 거부당하자, 아예 강제로 겁탈하고 쫓아버리는 천인공노할 죄악을 저지릅니다. 원통한 일을 당한 다말은 통곡하며 돌아옵니다. 압살롬은 누이로부터 기막힌 이야기를 듣고, 일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립니다.
그러고 나서 2년이 지났을 때, 압살롬은 기회를 타서 졸개들을 시켜 암논을 척살합니다. 이 변고 소식을 들은 다윗은 왕자들이 모두 살해된 줄로 알고 땅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합니다. 다윗 집안에서 자식들의 비극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고, 막을 수 있었던 일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맏아들이 저지른 천인공노할 일을 모르는 체했습니다. 자기가 딸임에도 불구하고 원통하고 치욕스러운 일을 당한 다말에 대해서 어떻게 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때 다윗은 침팬지처럼 억울한 일 당한 자기 딸에게 메타인지능력 제로, 공감 능력 제로인 상태의 우두머리 의식만 지닌 동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삼하 11장)
다윗의 죄악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가장 절친한 친구로, 충성을 다하는 장군 우리아를 돌아올 수 없는 전선에 나가 죽게 하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으면서 벌인 수작은 천인공노할 일입니다. 이때 다윗의 모습은 역시 우두머리 침팬지가 따로 없습니다. 자기가 성취한 통일왕국이 겨우 2대를 끝으로, 남북으로 분열한 것을 보면 다윗의 죄와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렘 20:1, 23:23-32)
종교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시대에 제사장 바스훌이 있습니다(렘 20:1). 예레미야가 재야에서 활동한 목회자였다면, 바스훌은 누구나 우러러보는 예루살렘성전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중앙 성소의 담임 목회자로 볼 수도 이는 인물입니다. 바스훌은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암흑 같은 시대를 대낮같이 밝혀줄 말씀의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유진 피터슨). 수많은 백성이 그의 만사형통 설교에 감격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는 그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백성들은 큰 위로를 받았음은 말할 것도 없고. 모세, 다윗, 솔로몬과 같은 찬란했던 지난날의 영광을 드높이는 그의 설교를 들은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부심이 한껏 고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불의를 질타하는 설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위로와 희망과 성공담으로 가득한 말씀만이 나왔습니다. 바스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시대의 죄악을 마사지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설교자였던 것입니다.
당시 예레미야 역시 바스훌을 역겨워했습니다. 그는 “평강하다, 평강하다”(렘 8:9b-12a)라고 설교하는 자들이 얼마나 가증한지를 거침없이 비판했습니다. 마침내 예레미야는 바스훌의 눈 밖에 나서 린치를 당하고, 진흙 감옥에 수감됩니다. 바스훌의 눈에 예레미야는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바스훌과 같은 자들을 어떻게 보셨는가? “내 말을 도둑질하는 자들”이라며 “내가 반드시 심판하겠다”라고 하십니다(렘 23:30). 유감스럽게도 오늘 우리 시대의 많은 목회자들이 예레미야의 말씀을 읽으면서도 바스훌을 닮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햇순, 2010년 8호) 오늘 말씀의 시각에서 보면 바스훌은 그 시대의 불의에 대해 아예 눈을 감은 사람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복잡한 것 같아도 어떻게 보면 단순하기도 합니다. 그 시대에 강자가 약자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힘 있는 자에게는 너그러우면서도 약자에 대해서는 공감 능력 없이 몰인정한 나라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는 어떻게 사신 분인가를 생각합니다. 다윗과는 완전히 반대로 사신 분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것은, 바로 세상의 약한 자들과 공감한 데서 비롯된 일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희생이 ‘구원의 복음인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공감 능력 충만한 복음입니다. 다윗이 정치적으로 성공한 인물일지는 모르지만, 결코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는 될 수 없는 인물입니다. 문제는 그런 인물을 이스라엘은 줄곧 메시아의 표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말씀에서, 다윗에게서는 도무지 들을 수 없는 말씀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언젠가 제자들 마음에 심어둔 이 말씀들이 제자들 가슴에서 싹이 나고 자라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것을 믿고 바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다른 게 아닙니다. 공감하는 능력 충만케 하는 게 십자가 복음입니다. 특별히 세상의 약자들과 공감하게 하는 능력으로 충만케 하는 복음입니다. 복음은 열심히 말하면서, 유별나게 약자는 외면하고, 힘 있는 자만을 편드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믿는 사람이 아닌, 단지 복음을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망한 가운데서라도 ‘살아남은 자들’을 통해서까지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주께서 당신의 소원을 두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멘.
(삼일교회 원로 목사 하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