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때의 신앙
- 등록일
- 2026년 7월 27일
- 설교일
- 2026년 7월 26일
1.
요즘, 아버지 책을 쓰면서, 할아버지와 함께 두 분의 목회를 평(評)하게 되었습니다.
두 분이 다 어떤 분이셨을까?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큰 목회를 하신 분이었다고 평합니다.
할아버지, 강병주 목사님은, 일제 압제 시대에서 나라와 민족과 살리고 교회를 세우는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 방법으로 한글을 가르쳤죠. 이것은 ‘말’을 지킨 것이고, ‘말’을 지킨다는 것은 ‘얼’을 지키는 것입니다. 또한 농촌을 살리기 위해, 농사를 잘 짓도록 농사법을 개발하셨고, 청년들을 키우기 위해 면려회를 조직하고, 교회학교를 키우는 일에 진력했습니다.
본인은 앞장서서 목회하며 ‘청빈(淸貧)’의 삶을 본보이며, 총회, 노회, 교회 활동에 중심 자리에 계셨습니다.
아버지, 강신정 목사님은, 일제 말기부터이지만, 본격적인 목회는 6‧25사변 이후, 우리나라가 가난했던 때,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헌신과 사랑과 올바름으로 목회했습니다. 이 나라가 경제적으로 부요해졌지만, 정치적으로는 독재정치였기 때문에, 불의에 정의를 세우기 위해 ‘용기 있는 화해자’로 올곧게 사셨습니다. 기장 교단 또 한국교회 안에서 큰 어른으로 그늘이 된 분이었고, 흔들림이 없는 목회를 본 보인 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2.
나도, 어느새 팔순이 가깝다 보니, 나는 어떤 목회를 했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목회하던 때는 할아버지나 아버지, 그분들이 뿌려놓았던 씨앗들이 자라고 열매가 되어, 한국교회가 부흥하게 되었는데, 부흥과 동시에 교회가 부패하기 시작하던 때, 그런 징조들이 나타나던 때가 나의 목회 시작하던 젊은 시절부터 은퇴하기까지의 현실입니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가난에서부터, 경제성장이 세계에서 손가락을 꼽을 정도의 나라, 경제 대국이 되는 동안에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유물사관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교회도 목사님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3박자 축복”이니,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라고, 부추겼습니다. 이것은 ‘영적(靈的) 타락(墮落)’이었습니다. 성직자들도 권세를 추구하고, 성공한 목사, 대형 교회를 만들면 성공이라는, 재물이 많으면 성공이라는 것으로 환치(換置)된, 복음과 다른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담임목사 청빙은 사라지고 취업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사실 이런 시대에서 올바른 교회를 가꾸어 간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나는 50여 년의 목회를 반추(反芻)해 보면, 올바른 목회를 위해서, 잘못된 세상을 따라가려는 교회에 대해 “이건 아닙니다!” 라고 소리치며 버틴 목회였다고 스스로 평(評)해봅니다.
3.
할아버지, 아버지 때에는 목회자에 대한 신뢰나 존경이 있었습니다. 또 그 어른들은 굳이 누가 보지 않아도, 스스로 삼가고 자신에게 엄격(嚴格)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목회할 때는 이미 세속적 가치가 교회 안에 들어와, 목사에 대해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는지의 학력, 얼마나 큰 교회를 세웠느냐의 경력으로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이나 교인이 옛 어른들을 보던 시각이 사라지고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복음을 상실하고, 예수님을 없애고 무당 되게 했고, 욕망덩어리로 변한 괴물이 되었는데, 이때 나는 총회나 노회의 직책을 거부하며, ‘오직 교회 중심의 목회’에 진력한 이유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 혼자라 하더라도 지키자” 이것이 50여 년 동안의 목사로서 나의 길이었다고 자평(自評)합니다.
4.
사실, 부패하고 타락하고, 세상이 걱정하는 교회를 복음으로 지키려 한 마지막 세대의 목사가 아니었는가 생각하면서, 내 후배들을 평합니다.
후배 목사님들을 보면, 슬픕니다. 교회가 그동안 지켜왔던 오랜 영성(靈性)의 전통(傳統)이나 법(法), 이것이 없어요. 그리고 모두, 물론 가난한 목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속에는 가난해지는 것을 두려워해서 재물에 목적을 두며, 욕심을 포기하지 못하며, 비상식적인 일에 동참하고, 도모하는 것을 봅니다. 이러한 목사들 눈을 보면, 마음 중심에 주님의 교회가 없고, 교인에 대한 사랑도 없는, 오직 목사 자기만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목사라고 부르기가 부끄러운 사람이 의외로 많다고 하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어른들만큼 되지는 못했지만, 아들 목사, 강승구 목사가 부끄러워하는, 창피해하는 아버지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아들 목회에 걸림돌이 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5.
나까지 3대로 이어진 목회를 “때의 목회”라 정리합니다.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을 때, 하나님은 언어를 흩으면서, 아브람(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다”를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 섬김’을 가운데 자리에 두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자리를 탐낼 때, 하나님을 하나님 자리에 계시게 하는 믿음의 사람, 그것이 아브라함 ‘때의 신앙’이었습니다.
모세는 어땠을까요? 흔히 출애굽만을 얘기하는데, 여기에는 사실 애굽에 정착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애굽이 주는 안식(安息), 부(富), 평안(平安), 종교에 취해가고 있을 때, 다시 조상의 하나님을 찾게 한 사건이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깨달음의 도구가 출애굽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을 때,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을 기억하라 한 것입니다. 율법(律法)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알려주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알파요 오메가이며, 축복과 저주, 구원과 심판이며, 신실하시며 약속에 철저한 분이며, 어느 때나 하나님은 공정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서는 것이 ‘사는 길’(구원받음)이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정말 이것이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시련과 고난, 나라 잃음, 전쟁 등은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 앞에 서는 유일한 법을 잊은 것입니다. 그래서 ‘때의 신앙’으로 보면, 시대마다 예언자를 보내어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서는 것, 율법을 지키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걸맞은 신앙을 가르친 것입니다.
6.
할아버지 목회 때는, 일제 치하(治下)에서 신앙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물음에 대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여야 하는데, 그러려면 배워야 한다, 미신을 타파해야 한다, 한글을 알아야 한다는 것으로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아버지 목회 때는, 6‧25나 5‧18의 분단 상황에서 어떤 것이 믿음이냐? 물음에 대해 정의, 정직, ‘오직 예수’로 믿음을 지키면서 시대 사명을 이끌어가는 힘이었습니다.
나의 목회 때는, 급속한 경제적 성장과 부흥의 부작용이 나라와 교회를 지배하고 부패하기 시작할 때, 조상에게 부끄럽지 않고, 아들에게 대를 물려주는데 부끄럽지 않게, 어린 양을 키우는 목회에 진력했습니다.
이제 현실로 돌아옵니다. 2026년 현실은 어떻습니까?
맘몬 숭배의 현실이 심각합니다. 이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팽배(澎湃)합니다. 이것에서 탈피(脫皮)해야 합니다.
우리만 아니라, 온 세계적으로 이념(理念)의 싸움이 심각합니다. 이 굴레를 벗어야 합니다.
모든 창조물과 공존(共存)하는 일을 일깨워야 하며, 일용할 양식으로 사는 일들을 공유(共有)하는 것,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때의 목회”라고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의 로마서 13:11-12 말씀“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라 한 바울의 깨달음도 우리 시대에 적합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에베소서 5:16-17 말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그리고 오늘 본문 로마서 12:2과 1절의 말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에서, 세상의 유물적 가치관에 물들고 젖어 사는 것은 어둠의 옷을 입는 것이므로, 이런 때에 빛의 갑옷을 입자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진단한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걱정하게 하는 세상, 악한 세상입니다. 이런 때에 구원받는 길, 그래서 바울이 권한 믿음의 생활은, 빛의 갑옷을 입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삶을 사는, 영적 예배를 드리는 삶입니다. 외로울 수 있고, 고난의 걸음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며, 하나님께서 함께 합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됩시다.
7.
마지막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하나 더 새겨봅니다. 사도 바울을 회심(回心)케 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 도(道)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했습니다. “나는 십자가에 예수와 함께 못 박혔다. 이제 나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살게 하는 것이 나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道)’라고 했습니다. 어떤 시대에서 이 말씀을 했나요?
바울 시대는 로마의 지배 시대, 폭력으로 유지되는 평화인, Pax Romana가 본질입니다. 폭력, 지배, 늑탈, 권력사용, 재물 숭상, 인간 중심인 유물관의 세계에 희망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구원이 없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훼파(毁破)한 ‘로마의 평화’의 본질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이것이 바울로 ‘코페르니쿠스적 회심(回心)’을 하게 했습니다. 회개(悔改)가 아닙니다. 마음을 완전히 바꾼, 회심(回心)입니다. 바울의 신학이기도 하고, 우리가 따라야 할 신앙의 본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십자가(十字架) 도(道)’입니다.
아버지는 찬송가 450장 1, 5절을 애창(愛唱)했습니다.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
살 같은 빠른 광음을 주 위해 아끼세. 온몸과 맘을 바치고 힘써서 일하세. 아멘.” 아버지의 신앙고백과 삶의 태도를 알려주는 찬송가입니다.
어머니는 목사인 내게 유언(遺言)으로 “예수 잘 믿어라. 예수밖에 없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새기면 새길수록 감동하며 놀라게 됩니다.
복음을 우려내고 우려낸 진액(津液)을 내게 말씀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복음의 본질이 무엇이냐? 예수밖에 없다. 십자가의 도밖에 없다.
복음의 본질을 믿으며 지키는 목사 되길 바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시대는?
기독교의 타락 현상이 심화(深化)되었습니다.
교회가 세속주의로 변질되었습니다.
교인들도 선택적으로, 이기적인 말씀 믿기로, 율법주의에 물들고,성직자라는 목사들도 복음적 가치보다 세속적 가치를 우위에 두는, 세속적인 축복을 외치는 거짓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런 때, 다시, “예수 잘 믿기, 예수밖에 없다. 복음뿐이다. 십자가의 도(道) 뿐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이라 하신, 이 신앙의 회복에 힘을 기울이며 삽시다.
우리 가정에서부터, 한 사람으로부터 일어나야 할 신앙임을 믿으며, 나눕니다. (기도) 4대, 5대로 이어가는 우리 가정 중심에 십자가의 도가 살아있게 하시고, 시대는 달라지지만, 시대마다 믿음의 요청이 있음을 듣고 십자가의 도를 새기는 우리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7월 26일에는 무의도 하나개 해수욕장에서 주일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목회할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예배이지만, 은퇴 목사라는 자유가 바닷가에 제단을 쌓을 수 있게 했습니다. 갈매기가 떼 지어 지나가며 예배 구경(?) 했습니다.
작은 게 한 마리도 구멍 파다가 멈추어, 파도 소리에 묻혀 퍼지는 예배하는 소리 들었습니다.
은혜가 가득한 바닷가였답니다.
강석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