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영문(營門) 밖으로
- 등록일
- 2026년 7월 13일
- 설교일
- 2026년 7월 12일
성경: 히브리서 13:12-13
찬송가: 515장, 323장
1.
찬송가 515장이 그려 보이는 세상은 “믿는 자여, 어이할꼬?” 질문을 던질 정도로, 세상이 피폐해지고,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 식어가고, 욕심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아져,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이 무너진 세상이어서, “믿는 사람아, 어떻게 해야 하겠니?” 질문한 찬송가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가 어떤 시대일까요? 물질의 가치를 최고의 가치로 강조하는 세상이 되었고,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하여, 물질주의, 유물관의 세계에 빠져들어 가는, 정말 위험한 지경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환경을 파괴하는 일로, 지구의 온난화를 재촉하며, 전쟁을 일으켜서 자원을 독점하려 하고, 땅을 지배하면서 그 나라의 경제를 장악하여 주도하려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며, 빈부의 격차로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하여 사회적 불안 요인이 된 시대입니다.
세상의 구조도 보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조가 고정화되어 굳어지고 있습니다. 피지배자들은 지배자에 의해 꼼짝할 수 없게 갇히게 되어, 하라는 대로 해야 하고 끌려갈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강한 사람, 강한 조직, 강한 권력이 약한 사람을 억누르고, 빼앗고, 궁지에 몰아넣어도 힘의 불균형으로 저항하지도 못하는 시대라 하겠습니다. 과거에는 백성이, 국민이 무섭다고 했지만, 사실 무서워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강약(强弱)의 균형이 무너졌습니다. 우리가 운동회 때 줄다리기 단체 경기를 하는데, 팽팽하게 대결하다가, 어느 한순간에 균형이 무너지면서 한쪽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처럼, 균형이 무너진 세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교회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또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 하는 그 사람들이 시대의 위기에 대하여 어떤 역할을 하고, 영 향력을 끼치고 있는가? 질문하면, 이 역시 아무런 힘을 행사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여, 교회가 강자 편에 서고, 유물사관에 빠져 복음의 가르침을 희석(稀釋)시키고 오도(誤導)하는 교회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주일을 지키면서, 우리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며, 어떤 신앙의 사람으로 우리 자신을 세워가야 할까? 질문을 던지고, 성경에서 그 답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영문 밖으로 나가서, 아사셀 염소 한 마리가 되어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계신 그곳, “영문 밖, 그(예수)에게 나가자”라 한 히브리서의 우리에게 한 요청을 마음에 새기며, 우리 신앙의 자리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2.
“예수를 믿는다”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마태복음 16:24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신 예수님은 제자를 부를 때에, 마태복음 4:19에서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생각하면, “예수를 믿는다”라는 것은 ‘예수 따르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9, 13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받으리라.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했고, 빌립보서 2:5에서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자기를 낮추시어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하여, 바울은 “예수를 믿는다”를 ‘죽는 것’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으로는 ‘자기를 부인하기’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부인’을, 갈라디아서 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도록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뜻에서 고린도전서 15:31 ‘부활장’에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했고, 로마서 13:8과 13:10에서는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라 했습니다.
결국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삶은 ‘사랑을 나누는 사람’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고 사랑을 나누는 삶’을 말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3.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전하면서, 예수를 믿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는데, 예수께서 성문 밖에서 십자가 능욕(凌辱)을 지고, 우리 죄를 대신하셨듯이, “우리도 ‘영문(營門) 밖으로’ 그(예수)께로 가자” 한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은 한마디로 레위기 16:21-22의 ‘아사셀 염소처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속죄제를 드립니다.
이때 흠 없는 염소 두 마리를 성별(聖別)하여, 한 마리는 잡아 제단에 번제물 삼고, 다른 살아 있는 한 마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두 뿔에 짊어지고 광야로 버려집니다.
‘광야(廣野)’가 의미가 있습니다. ‘성문 밖’이며, 이곳은 보호를 받지 못하는 곳입니다. 이와 같은 ‘광야’로 버림받는 염소를 ‘아사셀 염소’라 부릅니다.
아사셀 염소를 성 밖으로 내몰기 위해 ‘영문(營門)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비교되는 곳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城)안, 예루살렘 성전(聖殿) 안인데, 이곳이 사람의 조직과 사람의 유물사관이 채워져 있는 곳인데, 예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이곳을 떠나서 광야로 나갔다는 것은, 오늘의 교회가 지향해야 할 곳이 어디 인지를 분명하게 지시하고 있습니다.
‘성(城)안’, ‘영문(營門) 안’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안,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가 없습니다.
무너져야 할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교권(敎權)의 유물(唯物)만이 춤을 춥니다.
세속주의에 짙게 물들어져, 하나님의 뜻이 없었습니다.
욕망덩어리요, 물질 욕심의 죄에 젖어있는 곳이 ‘영문 안, 예루살렘 성전 안’이었습니다.
“영문(營門) 밖”은?
“성문 밖, 광야(廣野)는?” 성안의 사람, 구조, 조직 등에 의해 내몰려 가난하게 사는 사람, 오직 하늘 향해 두 손을 벌려 도와달라고 간청할 수밖에 없는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뜻에서 “영문 밖에 그에게로 가자”라는 말씀은 그곳이 십자가가 세워져야 할 곳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생명이 되어, 살아있는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결국 예수님 부탁의 말씀은 “네 이웃, 그것도 지극히 작은 자로 계신 예수에게, 자비를 베풀고, 사랑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 예수가 살아계신 곳” 이곳에 우리가 가야 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4.
2026년 1월 20일 신문 기사입니다. 경기도 화성소방서, 윤희(30세) 소방사는 2023년 5월에 신장암으로 수술받았습니다. 죽음의 고비를 넘고 살아난 분입니다. 그는 회복 후, 머리칼을 길렀습니다. 2년 넘게 길러 40cm가 넘은 머리칼을 소아암 환자에게 기부했다는 내용입니다.
“작은 힘이라도 아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윤희 소방사는 여겼습니다. 소방사의 규정으로는 머리칼을 길게 기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윤희 소방사의 소아암 환자를 위한다는 목적을 알게 된 소방서장은 머리칼을 기르도록 허락하였습니다. 나는 윤희 소방사가 그리스도인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영문 밖으로 나가신 예수님의 일을 행한 것이고, 그에게는 예수님의 마음’이 있었다고 믿습니다.
지난 4월 1일에 필리핀 선교사 방태화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은 장발(長髮)로 나타나서는, “아직 1cm가 모자라서”라 하며,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1cm를 더 길러 소아암 환자에게 기부하고 필리핀으로 떠날 것이라 했습니다. “손이 많이 가지만, 이 정도 정성을 들여야 한다”라고 하는 목사님의 눈빛에서 예수님 사랑의 눈빛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설교한 원주 열린 교회는 장애인을 돕는 복지시설을 운영하는 작은 교회입니다. 원주 시내를 벗어난 지역, 옛날 원주 쓰레기 소각장 터 위에 세운, 40년 된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 대학교수로 은퇴한 분의 가족이 열린 교회를 찾아와 등록하여, 권사로 임직하며, 명예 권사가 되었습니다. 시내 대형 교회를 다녔었는데, 그 교회를 떠나, 작은 자의 고통을 끌 어안고 사는 작은 교회를 찾아, 자신의 작은 도움의 손길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분에게서 영문 밖, 예수님께로 간 걸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예수 믿기, 예수 따르기, 예수 닮기, 예수 본받기, 예수님 말씀 실천하기, 예수 마음으로 살아보기 등등, 나는 이것을 “영문(營門) 밖에 계신 예수께로 가기”라고 말씀드립니다.
5.
2025년 12월, 백련산 겨울 숲길 위에서 쓴 시가 있습니다. 몇 번 인용했던 것인데, 다시 읽어봅니다.
『나무들이
그냥 서 있는 줄 알았다.
어느 날
나무들이 내게 말했다.
살기가 너무 힘들어 죽겠어
죽고싶을 정도로 힘들어
하더니
슬프디슬프게, 너무나 서럽게
운다.
너무 놀라서
어쩔줄 몰라 하다가
나도, 사는게 힘들어 죽겠지만
우는 나무를, 꼬옥
끌어안아 주었다.
나무들이 내게 말했다.
당신 때문에
살았다고,
당신 때문에
살겠다고.
그날 이후
나는 숲속에서
나무들의 나이테 속에 담아 둔
노래를 들었다.』
(서울 북쪽에서 바라본 북한산)
어쩌면 나의 이 시를 쓴 마음이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성문 안, 예루살렘 성전 안의 타락)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신앙” 으로 살아가라고, 그런 교회를 세워가라는 말씀으로 듣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4과 4:1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지를 배우고 행하라.” 이 말씀을 실천하는 교회가 이 시대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요, 걸음이라고 믿습니다.
모든 것이 파괴되어 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믿음의 걸음이라 말씀드리면서, 우리도 이 걸음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예루살렘 성전, 무너지라 하시고
영문 밖
고통이 있고, 슬픔이 있고, 아픔이 있고,
하나님을 향해서 손을 벌려 탄원할 수밖에 없는
고난이 있는 곳을
내가 있는 곳이다,
여기에 십자가가 세워져야 한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우리들이 세워가는 교회가, 우리의 믿음이
영문 밖 예수님을 찾아가는 교회요, 믿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강석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