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성호교회 장로임직식 설교 원문에 실린 그림 또는 사진 1

영광스러운 자리에 불러주셔서 감사드리니다.

강석찬 목사님, 신동일 목사님, 유원규 목사님이 앞에 앉아계셔서, 혹시 포크레인 앞에서 삽질하는 기분 아셔요? 제가 하늘 같은 선배님들 앞에서 갑자기 재롱떠는 기분이긴 하지만, 이 자리가 다시 한번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를 돌아보고, 결단하는 은혜의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종교를 인류학자들은 딱 두 가지로 구별합니다. 고등(高等) 종교와 저등(低等) 종교입니다. 고등종교와 저등 종교의 구별 기준이 무엇인지 아셔요? 모르시면 지금 내가 종교 생활을 하는데, 기독교가 고등종교인지 저등 종교인지 모르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됩니다.

그 기준은 자기 부인이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자기 부인이라고 하는 것은 내 뜻과 내 계획과, 내 의도를 부정하고, 내가 믿는 신, 절대 타자의 뜻을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종교가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공익과 대의, 혹은 영적인 목표를 이루는 숭고한 뜻에 헌신할 때 그 종교를 고등종교라 합니다.

저등 종교는 타인이나 공익이나 아니면 숭고한 가치에 관해서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내 욕망과 욕구의 충족을 위해서만 신앙생활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저등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라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 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을 보더라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나라에 대한 기도를 먼저 하고, 그다음에 내 필요를 채울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기도가 뒤에 나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가르침으로만 보면 고등종교에 속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종교가 지향하는 가르침에 의해서 그 종교가 고등종교냐, 그 종교가 저등 종교냐 나뉘는 것이 아니고, 그 종교에 몸을 담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보이는 신앙의 태도에 따라서, 그가 고등종교를 저등 종교화할 수도 있고, 저등 종교인 무속신앙도 고등 종교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의 할머니의 어머니 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새벽에 일어나 정한수(井華水, 정화수의 비표준어, 이른 새벽에 길은 우물물)를 떠 놓고 지성을 드렸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님께 비나이다.” 했습니다. 정한수가 어떤 물인지 아셔요? 안 해보셨으니까, 잘 모르시겠죠? 우물에 달그림자가 비췰 때 뜨는 물이 정한수입니다. 정수기에서 받은 물이 아니고, 정한수를 받으려면 새벽 3시경에 일어나, 우물에 달그림자가 비췰 때 그 물을 떠야 합니다. 우리가 새벽에 기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성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단지 자식들의 평안과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아니면 숭고한 대의적인 목적을 위해서 정한수를 떠 놓고 지성을 드렸다고 한다면, 적어도 그분이 섬기는 종교는 고등종교가 되는 겁니다. 누구를 섬기느냐의 문제는 구원과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문제이고, 종교를 분류할 때는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한 교회를 대표하는 담임목사에게 자기 부인이 없으면, 그 교회가 섬기는 하나님은 저등 종교의 신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교인을 대표하는 장로의 신앙과 믿음이 자기 부인이 없으면,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자기의 의나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리면, 그 교회가 섬기는 하나님도 저등 종교의 신이 되어버립니다. 가르침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가르침은 분명히 영적인 가치를 가르치고 있음에 불구하고 그것을 믿는 신앙인들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데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신뢰와 인정을 못 받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쉽게 풀어서 쓴 내용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용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게 아니다. 나는 없다. 내 뜻과 내 계획, 의도와 욕망, 모든 것이 다 없어진 것이다. 이제는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그 믿음 안에서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이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내 이름을 내기 위해서, 내 업적을 남기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선언합니다. 날마다 자살 시도를 하는 것은 아니겠죠. 자기의 뜻, 계획, 의도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골로새서에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라.” (골 1:26-27)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떠나서 저기 먼 우주 공간에 머물러 계시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계신다고요? 내 안에 계십니다. 내 안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신 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세와 만대 전부터 감추어왔던 비밀인데, 이방인인 너희들에게, 모든 사람에게 이것을 공개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우리가 깨닫게 되면,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곧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자각하는 것입니다. 내 뜻과 내 생각과 내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서 움직이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 말씀을 보면, 제가 이 말씀을 대단히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말씀인데요,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한 이야기가 아니고,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믿음 안에 있는지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아무리 기독교라는 이름의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너희는 나중에 버린 자가 될 것이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서 모든 것을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버릴 때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보면, 성호교회에 올 때마다 이런 것이 있나 하고 주변을 살펴봅니다. ‘아무개 증(贈)’, 하고 몇 년, 월, 일을 붙여 놓은 것 말입니다. 어떤 교회에 가면, 아날로그 초침 시계와 전자시계가 같이 붙어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늘 시계를 헌물한 권사님이 아직 안 돌아가셔서 떼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내가 한 것이니까요. 여기서부터 제가 말을 조심해야 하는데, 모 교회 장로님이 강대상을 리모델링하는데 1억을 제공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LED 화면이 큰 것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커야 하는데 너무 작았습니다. 예배 시간에 계속 그것만 보고 있습니다. 예배 끝나면, 조명을 이것으로 바꾸었으면 좋겠다, 위치를 조금 바꾸었으면 좋겠다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께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고,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쳤고,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일을 했습니다”라고 하였더니, 예수께서 뭐라 하셨습니까? “나는 너희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마태 7:22-23) 하셨습니다. 분명히 그리스도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병자도 고치고, 좋은 일을 많이 했지만, 왜 그것이 불법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법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주어가 바뀌어져야 합니다.

능동교회는 대로변에 있기 때문에 주일 아침 일찍 교회에 가면 현관 앞에 담배꽁초가 떨어져 있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줍겠습니까? 안 줍겠습니까? 평소 본인이 하시는 대로 생각하시는 겁니다. 줍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을 때, 무슨 생각을 많이 하느냐 하면, “아이고, 누가 봐야 하는데… 교인들이 오다가 봐야 하는데… ” 그래야 “목사님이 아무도 안 보는 데서 이런 일도 하시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저는 “아차!” 합니다. 이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닌데, 내 안에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서 교회를 섬기시는 것인데, 내가 한다고 생각하면 기분 상할 일이 굉장히 많습니다. “저 사람, 나보다 교회 늦게 왔는데, 나이도 나보다 어린데, 내가 직분이 먼저인데”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왜 먼저 인사해야 해? 내가 왜 그릇 치워야 해? 내가 왜 구정물에 손을 대야 돼?”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서 이 사람을 섬긴다면, 내가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섬김을 내가 방해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막는 것이 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서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내가 한 것이라고 착각하면 그것이 바로 불법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건강은 누가 주셨습니까? 배울 기회와, 돈 벌 수 있는 기회와, 섬길 기회를 누가 주셨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믿음의 법으로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의와 이름을 내세우게 되면 “나는 네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밖에 나가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역이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는 굉장히 좋은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반면에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는 유혹에 끊임없이 빠지게 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중세에 스페인의 아벨라라는 곳에 살았던 데레사라는 수녀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성녀라는 칭호를 가톨릭에서 받았습니다. 그분이 쓴 기도시에

“그리스도에게는 이제 몸이 없습니다.

당신의 몸 밖에는

그리스도에게는 손이 없습니다.

당신의 손 밖에는

그분에게는 발이 없습니다.

나의 발 밖에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눈을 통하여 연민 가득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발로 뛰어다니시며 선을 행하십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의 손을 들어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당신의 손이, 그분의 손이며

당신의 발이, 그분의 발이며

당신의 눈이, 그분의 눈이며

당신이 그분의 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시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내가 눈을 감으면 사랑의 대상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실 수 없습니다. 내가 발을 움직이지 않으면,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가실 수 없습니다. 내가 손을 묶어버리면, 손을 쥐면, 손을 통해 아무것도 예수님은 들려 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모든 것을 누가 하는 것입니까? 내 안에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사용되는 것만으로도 은혜입니다.

옆에 분들에게 이렇게 말씀해 보십시오. 사이 안 좋으셔요? 얼굴 보시며 미소 지으며 말씀하셔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당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한 분이십니다.” 동의하시나요? 동의한다면, 내가 섬기는 것이 아니라 누가 섬겨요? 내 안의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서 이분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네가 이 분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이분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분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만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16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했습니다. 사람에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안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다고 믿는 사람은 다른 교우 안에도 그리스도가 계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을 환대하는 것은 이 사람을 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내가 환대하는 것이고, 이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사람만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분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만나는 교회,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를 환대하고, 축하해 주는 교회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 가시려고 기대와 소망하는 교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 살아있는 성전입니다. 성령께서 거하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 그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교회의 사역은, 업적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름을 남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서 어떻게 하면 드러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엄청나게 싸웠습니다. 나는 아볼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세례를 바울에게 받았으니 바울파다, 하면서 서로 싸웠습니다. 그때 바울은, “아볼로는 심었고, 나는 물을 주었지만, 아무것도 아니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라 했습니다. 강동영 목사님, 죄송하지만, 아무것도 아닙니다. 원로장로, 시무장로로 계시는 분, 죄송하지만, 아무것도 아닙니다. 교회를 자라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일을 하신 것이지, 내가 했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수준, 믿음의 자리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자리가 어디인가? 하면, 그 교회의 영적인 수준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곳은, 당회입니다. 회의하는 자리입니다. 서로 다른 의견이 부딪치는 자리, 거기에서 과연 자기 부인이 있느냐, 없느냐. 내 뜻이 실현되지 않을 때, 그때부터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하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믿음의 불일치가 오히려 서로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런데 내 주장이라고 생각하고, 내 의견이라고 주장하고, 또 저 사람의 뜻이라고, 저 사람의 말이라고 생각하니까, 비교하기 시작하고, 지지 않으려 하고, 경쟁하고, 마음 상하게 되고, 그래서 갈등이 생기는 것이죠.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 겸손하게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기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은 자기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밀가루 속에 감추인 누룩처럼, 땅속에 썩어져 가는 씨앗처럼, 새로운 열매를 맺기 위해 묵묵히 맡겨진 길을 묵묵히 걸어갈 뿐입니다.

이번에 임직하는 두 분이 그렇게 교회를 섬겨오셨던, 아무것도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여 묵묵히 섬겨오셨던 선배 장로님의 유산을 잘 받아서, 성호교회가 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고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저희의 말과 표정과 손짓과 발짓과 모든 몸짓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길 원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역을 통해서 저희가 하나님의 성품과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는 사람으로 성숙해지기를 원합니다. 저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능동교회 담임 목사, 서울북노회 증경노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