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고 싶은 설교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주일예배 설교(박민목사) 원문에 실린 그림 또는 사진 1

지난 주일에 창립 70주년을 맞이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향하여 뜨겁고, 이웃을 향하여 따뜻한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말씀을 함께 나눴습니다. 저는 이것이 십자가가 아닐까, 생각하며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우리 교회가 먼저 하나님을 향하여 뜨거워야 한다는 말씀을 나눴고, 오늘은 우리 교회가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들에게 따뜻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교회는 왜 따뜻해야 하는 걸까요?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그냥 따뜻한 것이 좋은 거니까요? 그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따뜻해야 한다는 건 이런 것 같아요. 사람은 누구나 따뜻한 걸 좋아합니다. 따뜻한 곳을 찾아갑니다.

그래서 따뜻한 곳에는 사람이 모이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만 생각해 봐도, 저는 음악을 들을 때 따뜻한 음악, 글을 읽을 때 따뜻한 글, 사람을 만날 때 따뜻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저는 겨울이 되면 남모를 고민 하나가 있습니다. 어머니 체질을 물려받아 태생부터 손발이 차갑다는 겁니다. 예배 후 악수할 때, “목사님 손이 차요.” 하면, 이유 없이 민망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준비한 말이 있었죠. “제가 가슴이 뜨거워서 그렇습니다. 열기가 가슴에 모여있어 손발이 조금 찹니다.” 그래도 누구하고 악수할 때 꼭 “손이 차갑습니다”라고 미리 말하고는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같이 강추위가 계속될 때 누가 차갑고 추운 곳에 가려고 하겠어요? 누구나 따뜻하고 언 몸을 녹일 수 있는 곳을 찾지 않겠느냐 하는 겁니다. 따뜻하다는 건,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걸 말하는 거라고 할 수 있어요, 항상 말씀드립니다만 살아있는 사람의 몸은 따뜻하지 않습니까? 극단적인 예가 되겠지만 죽은 사람의 몸은 차갑게 식어갑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오랫동안 병을 앓았거나 또 몸이 많이 안 좋은 사람의 몸은 어떻습니까? 몸이 차갑습니다. 그건 아마도 그 사람의 몸 안에 어떤 생명력이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하는 겁니다. 생명이 떠나면, 몸이 차갑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따뜻하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한 교회는 당연히 따뜻한 곳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사람은 누구나 본질적으로 알고 보면 외로운 사람, 가족이 있고, 모여 살고는 있지만 결국은 혼자입니다. 처음 영어를 공부할 때, 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 등 품사 공부를 했는데, 집합명사와 군집 명사를 배웠습니다. 둘은 다릅니다. 집합명사로 family는 가족 전체를 통칭하는 것이지만, 가족 안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의미하는 군집 명사입니다. 함께 모여있으나, 그럼에도 우리는 각각 마지막 순간에 혼자입니다.

사람은 존재론적으로 외로운 존재, 누구나 이 세상에서 단독자로 살아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로운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어떤 곳을 찾게 될까요? 바로 따뜻한 곳을 찾게 마련입니다. 외로운 한 분, 한 분에게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가슴, 따뜻함이 필요합니다.

따뜻함이 우리에게 위로를 주고, 평안함을 줍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이런저런 걸 차치하더라도 어떤 곳이 되어야 하겠느냐? 하는 건데요, 교회는 따뜻한 곳이 되어야 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이 있어야 따뜻해질 수 있고, 어떻게 따뜻할 수 있는 걸까요? 그건 두말할 것 없이 교회는 사랑이 있어야 하고, 사랑으로 따뜻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사랑이라는 건 어쨌든 상대방을 서로 끌어안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서로 끌어안으면 어떻게 될까요? 열이 나겠지요? 그러면 당연히 따뜻해지는 겁니다. 제가 어린 시절만 해도 겨울이 참 추웠습니다. 제 초등학교 추억 가운데 하나인데, 옛날 집은 온돌을 깔았는데, 바닥은 뜨거운데 웃풍과 외풍이 심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추웠습니다. 이렇게 추운 날에는 제가 저의 형과 장난치면서 내복 바람으로 꼭 끌어안고는 했습니다. 서로 깔깔거리면서 웃곤 했는데요, 서로 끌어안고 있으면 어느샌가 따뜻해지고 더 이상 춥지 않았던 경험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도, 우리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교회가 따뜻해지려면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따뜻해진 우리가 어떻게 교회 밖 사람들에게 우리의 따뜻함을 전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어느 계명이 가장 크냐?” 라고 묻는 한 서기관에게 예수님이 먼저 “모든 걸 다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이어서 본문 31절에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 교회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 이웃들에게 따뜻한 곳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서 제가 눈여겨보려고 하는 건 무엇이냐 하면, 이웃을 사랑할 때 어떻게 사랑하라고 하셨습니까? 바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걸 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라고 할 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내가 나를 어떻게 사랑하는 걸 말씀하는 것이냐? 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웃’을 말하기 전에 먼저 질문하게 되는 건,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있기는 한 걸까? 하는 겁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나?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한 가지 더 묻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질문에 당연히 내가 날 사랑한다고 답하시겠죠.

정말 그렇습니까?

우리들은 내가 날 사랑한다는 것을 착각하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소유와 성취’로 판단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 우리가 원하는 걸 얻어내고, 바라는 걸 이루어내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 내는 것을, 내가 나를 사랑하는 걸로 생각하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뭔가 내가 원하는 걸 소유하거나, 아니면 내 마음이나 뜻대로 뭔가를 성취하는 것을, 나를 사랑하는 걸로 생각하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 더, 심리적인 것이 있습니다.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자존심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자존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높아야 할 것은 자존감입니다.

자존감이 높아야지, 자존심이 높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약하다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은 내 안이 그만큼 비어 있다는 것, 허하다는 표현입니다.

알차고 옹골찬 것이 아니라 안이 텅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리적으로 내 자존심을 세우거나 지키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설사 남에게 상처를 주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그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걸로 생각하는 것 역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소유와 성취, 자존심을 세우는 것, 이런 것들이 정말로 우리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거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라는데요. 그것이 정말 내가 나를 사랑하는 걸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바라고 원하는 것들, 또 내 자존심을 세우는 거 가운데는, 물론 나에게 좋은 게 대부분이겠습니다만, 내가 갖거나 성취하는 것들 가운데는 어쩌면 나에게 좋지 않은 것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는 결과적으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내가 나를 해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들, 또는 내가 욕심을 부리는 것들을 다 이루고, 받고, 누리는 게 반드시 나를 사랑하는 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진짜로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건 어떤 거냐? 하는 건데요, 그건 어떤 외적인 것도 있겠습니다만, 사실은 내적인 게 아니겠느냐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건, 바로 나의 부족한 점이나 단점, 그리고 모자라는 점, 같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용납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니겠느냐 하는 겁니다. 생각해 보면 내가 만일 나의 잘난 점이나 잘하는 것만 사랑한다면 그게 나를 온전히, 전체적으로 사랑하는 게 되겠습니까? 또 앞서 말씀드린 것 같이 내가 원하는 걸 소유하거나 이루고 성취하는 것만이 나를 사랑하는 거라면 그게 진짜 사랑일 수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이 나를 사랑하는 거라면 그건 나의 일부분만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소유와 성취, 자존심은 나의 잘난 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만 나의 전부일까요?

나에게는 못난 면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건, 나의 잘난 점이나 잘하는 점만이 아니라, 나의 모자라고 부족한 점, 그리고 실수하고 실패하는 나의 모습까지 받아들이고, 용납하고, 아껴줄 수 있는 것, 이것이 우리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모습이 아니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그럴 수 있으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이 뭐가 부족하고 뭐가 모자라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건데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실 우리가 이렇게 나의 부족한 점이나 모자라는 점을 우리가 과연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며칠 전에 고등학교 시절 교회 친구들하고 저녁 식사를 했어요. 한 친구가 얘기 중에 자기는 어떤 점이 마음대로 잘 안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자기 딴에는 그 점을 고치려고 노력하는데도 그게 잘 안된다고 하소연한 겁니다. 내일모레면 60이 되는 나이입니다. 그래서 제가 친구에게 “너 자신이 그런 단점이 있는 걸 알고, 인정하는 것만도 참 대단한 거다”라고 말했어요,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를 잘 아는 것 같고, 또 자기를 잘 안다고 생각하고 말하지만, 사실 실제로 자기를 잘 아는 분들은 의외로 드물고, 혹시 알더라도 자존심 때문에 자기의 단점을 친구 앞이라도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가하는 길에, 저도 저한테 어떤 모자라는 점이나 부족한 점이나 또 단점 같은 게 있는지 생각해 봤는데요, 그게 없는 겁니다! 떠오르는 게 없더라고요! 물론 농담이고요, 부족하고 모자라는 게 어디 한두 가지겠습니까! 갑자기 ‘버럭’ 하기도 하고, ‘욱’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제 가족이 저한테 이구동성으로 조언 아닌 조언하는 게 뭐냐 하면? “왜 당신은, 또 아빠는, 얼굴에 그렇게 속마음이 빤히 들여다보이느냐?” 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어느 자리에서 그 순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거나, 무슨 마음을 먹고 있느냐? 그냥 다, 빤히 다 보인다는 겁니다. 이건 물론 좋게 말하면 순수한 거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나쁘게 말하면 아직도 뭔가 미성숙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나 다 이렇게 부족한 점이나 모자라는 점, 어떤 단점 같은 걸 다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이런 나의 모습을, 내가 받아들이고 있느냐? 또 그걸 용납하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더 나가서 이런 나의 모습까지도 내가 인정하고, 용납하고, 또 보듬어주고, 사랑하고 있느냐? 또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 거라는 겁니다. 분명한 것은, 바로 이런 모습까지도 내가 받아들이고, 용납하고, 보듬어주고, 또 사랑해 줄 수 있을 때, 우리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거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이웃’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어떻게 될까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렇게 우리 주변에 있는 분들이 가지고 있는 부족한 점, 모자라는 점, 또 단점 같은 거, 심지어는 나쁜 점까지도 받아들이고, 용납해 주고, 또 끌어안고, 보듬어줄 수 있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 바로 우리의 이웃들을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사랑하는 게 되는 게 아니겠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은 말처럼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지난 ‘수요 말씀 예배’ 시간에 두 주 동안 연속으로 말씀드린 것 같이, 우리가 서로의 얼굴이나 모습 그리고 인격이나 행동거지를 볼 때 가능한 게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처럼, 비록 우리가 다 부족하지만 서로의 영(靈)을 볼 때, 그 사람의 영(灵)을 바라볼 때 가능하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 시간에 우리 모두 영의 눈이 새롭게 열려서 사람의 영을 바라보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실 때, 그 사람에게 허락하셨고, 그 사람에게 덧입혀주신, 그 사람의 영을 바라볼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거리감을 느끼고, 싫은 감정을 갖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그분의 영을 보면, 마음이 ‘짠’ 해집니다.

그분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모쪼록 우리 성도들 사이에도, 또 가족들에게도, 가까운 이웃을 만날 때, 그는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어”가 아니라, 그분의 영을 보면서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마음, 이 마음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모두 주님 마음의 소유자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이웃들이 우리 곁에 한 걸음 더 다가올 수 있도록, 우리 교회가 지금보다 조금 더 따뜻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이웃이나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사랑할 수 있는 길은 어떤 길이냐? 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건 우리의 모자라거나 부족한 점까지도 우리 스스로 받아들이고, 받아주고, 보듬어주고, 사랑하는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우리가 이렇게 우리 자신을 아껴주고 보듬어주는 건 꼭 필요한 일입니다만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사랑은 끌어안는 것이라고 했지만, 이것으로 충분할까요?

단점을, 부족한 것을 끌어안는 것도 꼭 필요하지만, 한 걸음 더 내디디어야 합니다.

알게 된 단점을 바꾸고 고칠 수 있도록 기도하며 몸부림치는 것도 필요합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나 자신을 끊임없이 자라가게 하고 성장하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자녀들을 키우실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이들이 마냥 예쁘다고 모든 걸 받아주시며 끌어안았습니다.

그것뿐이었습니까? 끌어안기만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으셨지요. 바르게 가르칠 건 가르치시고, 야단치실 건 야단치고, 매를 들기도 하지 않으셨느냐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가 지금의 모습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사랑으로 섬기신 분이시고, 요한복음의 말씀으로 보면 우리를 사랑하실 때 끝까지 사랑해 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끌어안는 것으로 끝냈습니까? 아닙니다.

야단치고, 나무라고, 꾸짖기도 하셨습니다.

주저하는 제자들에게 “왜 너희의 믿음이 작으냐?” 라고 나무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여러분의 믿음의 인격이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가라”라고 가르치고 권면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먼저 자기 긍정, 곧 자기를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긍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정도 있습니다.

지금의 나를 부정하고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기도와 몸부림, 이것이 자기 부정입니다.

공식 하나 말씀드립니다.

‘자기 사랑 = 자기 사랑 + 자기 부정’입니다.

둘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자기 긍정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부정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정할 것은 부정하고, 긍정할 것도 긍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자기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나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는 건 바로 나 스스로 나 자신을 뛰어넘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더 나가서 긍정적인 의미로 나 자신이 지금의 나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역설적이고 아이러니한 것은, 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지금의 나를, 나의 모습을 부정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의 예수님 말씀을 보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하신 말씀을, 보통 우리가 각자 가지고 있는 어떤 욕심이나 욕망 같은 걸 내려놓으라거나 아니면 그런 걸 부인하라는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 역시 일리가 있습니다만, 오늘 설교의 맥락에서 생각해 보면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지금의 나 자신을 뛰어넘으라는 것이고, 뛰어넘으려고 몸부림치고 기도하며 자기를 부정하고, 또 뛰어넘어야만 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이런 의미와 맥락에서 여러분 자신을 먼저 사랑하시는 여러분이 되어, 지금도 충분히 기도하고 애쓰고 계시지만, 진정으로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시는 분들로서 지금보다 조금 더 자라가고, 성장하고, 성숙해질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자신을 뛰어넘어서 계속해서 자라가고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거라면, 오늘 본문 말씀에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은 우리가 또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 되느냐 하면, 우리 곁에 있는 이웃들이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서 더 나은 나로 성장하고 자라갈 수 있도록, 사랑과 믿음으로 도전하고 격려해야 한다는 게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웃들에게 말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겠습니까? 가르친다고 해서 되는 일이겠습니까? 아마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 될 겁니다. 어쩌면 “너나 잘해”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하는 건데요, 우리가 눈에 보이는 하나의 본보기, 귀감(龜鑑)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겁니다.

최근에 제가 노회 목사님들과 함께 천 페이지나 되는 책, 우리가 보통 ‘벽돌’이라고 부르는 책을 읽고 있는데요, 그만큼 두꺼운 책입니다. 책 가운데 내용 하나를 소개해 드립니다.

지난 12세기 영국에서 왕에 의해서 순교를 당한 토머스 베켓이라는 대주교가 있었습니다. 왕은 자기 말을 잘 듣지 않는 대주교를 너무나 미워하여, 죽이려고 네 명의 기사를 보냈습니다. 토머스 베켓 대주교는 왕이 그 기사들을 왜 보냈는지 알면서도 그들을 환대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들이 대주교를 계속해서 모욕하고 겁박하니까, 기사들을 내쫓고 대성당의 문을 잠그려고 하는 사제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빗장을 벗겨라! 문을 열어라! 나는 기도의 집이요, 그리스도의 교회인 성소를 요새로 만들지는 않겠다. 교회의 문은 열려야 한다. 적들에게까지도! 그러니 문을 열어라!” 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이 교회요, 신앙인이요, 믿음이라 한 것입니다.

그리고 토머스 베켓 대주교는 왕이 보낸 기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렇게 살기는 어려울 겁니다. 오늘날 누가 이렇게 살려고 하겠습니까? 다만 교회가, 그리고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어떤 믿음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비록 완벽하지는 못하겠습니다만, 끊임없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서 우리의 믿음과 믿음의 삶이 달라지고, 자라가고, 성숙해 갈 때,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그런 우리의 모습에 영향을 받게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우리 교회가 또 사람들에게 좋은 영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하나님을 향하여 뜨겁고, 이웃을 향하여 따뜻한 교회’, 따뜻한 교회가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 여러분에게,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방화동중앙교회 박민 목사

— 박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