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영원히 살기, 어떻게?
- 등록일
- 2025년 11월 24일
- 설교일
- 2025년 11월 23일
1.
오늘 성가대 몇 분이 찬양하셨어요?
반주자 빼니까, 여덟 분, 저는 80명이 찬양하는 것으로 들렸습니다.
옆에 같이 부르신 분들 보이나요?
안 보이세요? 영력(靈力)이 떨어지셨군요.
우리가 신앙으로 찬양하면 옆에서 돕는 영(靈)들이 있습니다.
오늘 아마 그런 찬양으로 제게 들려서, 목사님도 은혜가 됐다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교회력에 따라 오늘을 여러분이 영생 주일로 지키기 때문에, 영생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면서어떻게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을 찾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생각하면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참 오랜만에 수도교회에서 설교를 준비하면서,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하나?
굉장히 많이 고민했습니다.
먼저, 시인 김춘수(金春洙 1922–2004), 아마 이름을 들어보셨을 텐데,이분이 쓴 시 ‘꽃’이라고 하는 시를 읽어드릴 테니까, 마음에 담아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그의 이름을 불러줬더니그는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 그것을 존재하게 합니다.
저는 오늘 아주 특별한 영생 주일을 지키면서,이 시간에, 우리는 모두 우리들과 함께 사랑하며 삶을 나누었고, 때가 되었을 때, 하늘나라로 이주하신 분들의 이름을 불러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이름은, 아버지 이름도 좋고, 어머니 이름도 좋고, 형제들 이름도 좋고, 혹시 먼저 보낸 자녀들이 있으면 불러보고, 친구들이나, 그리운 이름이 있으면, 이 시간에 각기 이름을 불러봅시다.
저도 11월 9일에 세상을 떠난 형제가 있어서, 그의 이름을 부르려고 합니다.
한번 다 같이 불러봅시다.
여러 사람 불러도 돼요. 시간 드릴게요.
다 부르셨죠?
들었을까요?
우리의 믿음은 이름을 부른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 안에 지금 거하기 때문에 들었을 것입니다. 이름을 불러줬더니, “아, 나 잊어버리고 안 부를 줄 알았더니, 불러주네” 하고 기뻐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1장 25절과 26절에서“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물으셨습니다.
믿으십니까?
저도 믿습니다.
예수께서 무덤 속에 죽어있었던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너라!”(요 11:43)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시니, 그 부름의 소리를 들은 나사로가 무덤 문을 열고 살아났습니다.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에게 허락되는 신비한 은혜입니다.
이 은혜의 자리가, 영생 주일로 예배드리는 이 자리가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앞서 세상을 떠나신 분들의 믿음의 유산을 되새기면서,어떻게 우리도 영원히 살 수 있을까?
설교 제목에 대한 답을, 성경 말씀을 통해서 얻어보겠습니다.
2.
구약의 본문 창세기 3장 19절의 말씀은 우리가 내용을 잘 압니다.
따먹지 말라고 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죠.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런데 이 아담이 어떻게 지어졌는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지으신 사람에게 생기(生氣)를 코에 불어넣어, 사람이 생령(生靈)이 되었다.”(창 3:7)저와 여러분 모두, 하나님께서 코로 하나님의 생기(生氣), ‘푸뉴마’라고 하는 바람,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어 주셔서, 우리가 생령(生靈)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이 육체, 몸은 흙으로 지은 것이기에 흙으로 돌아가지만, 하나님의 기운, 생기가 담긴 생령(生靈)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야죠.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생명의 신비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따 먹으면 죽는다고 한 나무의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 22절에서 “이 사람(생령(生靈)이 된)이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에덴동산에서 추방했습니다.
창세기 3장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육체를 가진 사람은 유한(有限)한 존재이다. 흙에서 온 육체(몸)는 흙으로, 곧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하나님의 생기(生氣)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또 하나,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은,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하나님만이 영원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이 영원을 누리고 싶으면 생명나무 열매를 먹어야 하는데, 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길이 어떻게 됐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이 이걸 따먹을까 봐 걱정되어 불칼과 그룹들로 다 가로막아 놓으셨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게 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생명나무 열매가 있는 그곳, 에덴동산을 천국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거예요.
3.
영생을 누리게 하는 생명나무 열매가 있는 이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서신으로 읽은 요한계시록 21장 본문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이곳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지금 제가 밟고 있는 이 땅, 또 새벽을 깨워 쳐다보는 하늘은 없어지고, 새로운 하늘과 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설명하는데 보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계신다고 했어요.
알파와 오메가이며, 처음과 마지막이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있는 그곳이 새 하늘과 새 땅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 21장을 보면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들이 누굴까요?
바로 하나님의 백성인데, 21장 7절에서 ‘이기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이기는 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성서로 볼 때에 마태복음 16장 16절의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10장 9절과 13절에서“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는“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습니다.
여러분, 믿으시죠?
예, 저도 믿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 이 예수님을 성서는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요한복음 1장을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다. 이 하나님의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 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 있는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을 잘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바로 생명이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이 우리에게 생명을 누리게 하는 길이구나 하는 것을 성서는 알려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예수님,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요한복음은생명의 떡이다.
생명의 물이다.
생명의 빛이다.
길이다, 진리다, 부활이오, 구원이라고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아버지와 하나이신 분이라고 분명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사는 그것이 어떤 곳인가 했더니 “사망(死亡)이 없습니다. 애통(哀痛)하는 것이나, 곡(哭)하는 것이 없습니다. 아픈 것이 다시는 없습니다.” 요한이 계시로 받은 말씀인데, 요한이 본 그 환상의 표현은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 하면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로 좋고 행복한 그것을 뛰어넘는, 더 이상 우리가 그림으로 그릴 수 없는 행복한 곳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요, 우리가 소망하는 하늘나라라는 말씀입니다.
4.
다 들어가고 싶어 하실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는다고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데, 사실은 “누가 들어가느냐?” 하는 질문 앞에 서서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는 것을 들어보면 쉽지 않습니다.
물론 바울의 말씀대로 따라가면“예수님은 나의 구주입니다”라는 이 고백만 하면 들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오늘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이 그러한 내용이에요.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했지만,요한복음 14장의 예수님 말씀을 읽어보면그냥 “내가 예수 믿습니다. 예수님.” 이렇게 부른다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 말씀을 들어보세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라. 거처를 예비하게 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를 있게 하니라.” 여기까지는 우리에게 문제가 없어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예비 된 거처, 누구나 들어갈 줄 알았는데, 다음 말씀이 있어요.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이 말씀이 사실 생명 나라로 들어가는데 우리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길, 예수님의 진리, 예수님의 생명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만 아버지를 볼 수 있는 곳, 그곳이 허락된다는 거예요.
5.
저는 평생을 목회해 왔습니다마는, 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 앞에 설 때“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제힘으로는 결코 천국의, 영생의 백성이 될 수 없고, 누릴 수 없겠구나 라는 생각 때문에 절망을 한 적이 여러 번입니다.
여러분, 실제로 우리가 예수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시는 이 말씀을 온전히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게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어요?
저는 양심적으로 그렇게 답할 수 없었습니다.
노력은 했지만 정말 안되더라고요.
안 돼요.
그게 제 현실입니다.
제 현실임을 알고 얼마나 절망했는지 모릅니다.
마치 마가복음 10장 17~31절의 재물이 많은 한 사람과 같았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부자 관리라고 했고, 또 마태복음에서는 재물이 많은 청년이라고 했던 이 사람이 예수님에게 와서 질문했습니다. 그 대화를 여러분이 기억하실 겁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계명을 알고 있지 않니?”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보시고 사랑하셔서 하신 말씀이 이 말씀이에요.
“너에게 아직도 한 가지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가 너에게 있을 것이다. 나를 따르면, 내게 있는 영생이 네게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이 재물이 많은 이분이 어떻게 했어요?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예수를 떠났더라고 했어요.
제가 예수님이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이 말씀이 얼마나 힘든 말씀인지 모르겠다고 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저는 사실 부자는 아닙니다.
조그만 집이 있어요. 15평짜리 연립주택이 있는데, 예수님 말씀대로 하려면, 이거 팔고 가난한 사람들한테 주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래야지 맞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난 이걸 못해요.
여기서 잠도 자야 하고, 먹기도 해야 하고, 책도 써야 하는데, 이 집을 팔아서 남에게 주고 나는 거지가 되라는 얘기인가?
이러고 보니까 못 지키겠는 거예요.
여러분, 저는 예수님 곁을 떠났던 이 부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거예요.
우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생을 얻고는 쉽지만, 예수님께서 함께 걷자 하신 그 길을 걷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 아닌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참 어려운 길입니다.
예비 된 아버지의 집, 영생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그곳에 갈 수 없을 것 같은 제가, 구원을 말하고 영생을 설교하는, 저 자신도 확신이 없어졌어요.
그러던 어느 날예수님의 말씀을 읽다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6.
누가복음 10장 25~37절은, 여러분이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나오는 본문입니다.
이 비유도 영생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질문합니다.
부자 청년의 질문하고 똑같은 거였죠.
예수님이 “율법에 뭐라 했더냐?” 되묻고,율법 교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했습니다.” 답합니다.
“어, 그래 맞다. 네 말이 옳다. 그대로 행하라. 그러면 네가 영생을 얻을 거야.” 그러자 이 율법 교사가 예수님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내 이웃이 누굽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제사장하고 레위인은 강도 맞은 사람 곁을 지나가고사마리아 사람, 유대인에게 천데 받던 사마리아 사람이 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돌봐줍니다.
마지막 예수님 질문이 율법 교사를 향해서 “너는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었다고 생각하니?” “자비를 베푼 사람이죠?” “그래, 네 말이 옳다.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 자비를 베푼 그 사람처럼 행해라. 그러면 너의 질문 대답대로 영생을 얻으리라.” 이 말씀이 왜 제게 새롭게 들렸느냐? 하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 지금 도움이 필요한 네 이웃, 그에게 네가 자비를 베풀고 사랑을 베풀면, 그것이 바로 영생을 얻는 것이다.”라 한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길을,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서 전해주신 거예요.
길이 열리기 시작했어요.
제 얼굴이 좀 어두웠다가, 절망했다가 희망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만 그럴까 하고 다른 성경은 없을까 하고 찾아봤어요. 이 시각으로 누가복음 19장에서 삭개오를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삭개오도 이런 말을 해요.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주여,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습니다. 가난한 이웃에게 창고를 열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것뿐일까?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의 최후의 심판 비유. 여러분이 아시죠.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영광의 보좌에 앉았을 때’. 이것은 곧 심판하려고 온 세상 사람들을 보시면서 양의 무리와 염소의 무리,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 영생과 영벌, 이렇게 나눌 때,양의 무리에 속한 사람은 “이 사람에게 의인의 영생을 누린다”라고 하시면서“여기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 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소외당하고, 아픔이 있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이웃으로 삼아 도와준 사람에게, 양의 무리, 주님의 오른편에서 영생을 누린다, 영생을 허락해 주신다고 약속하신 거예요.
누가복음 16장 19절 이하를 보면, 한 부자가 나오는데, 그의 집에는 거지 나사로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 부자는 거지 나사로를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냥 자기 먹고 살다가 부스러기 떨어지는 것도 개가 먹어, 먹지 못하게 했죠.
이런 사람의 어디로 갔습니까?
음부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7.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예수님께서 복음서를 통해서 일관되게 영생을 얻는 길, 영생을 어떻게 허락받아 누릴 수 있는지 알려주고 계심을 발견하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희열과 감사가 넘치게 되었습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하는 이 말씀에서는제가 도저히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어서 절망했었는데,“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너의 이웃으로 맞이하면, 그것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 된다”라고 하시는 말씀 앞에서,저는 소망을 얻기 시작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언제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반드시 서게 될 그때,이웃이 없는 신앙생활은 심판받게 됨을 알려주십니다.
영원히 살기, 영생 누리기는, 우리의 현재(現在)에 그 길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인식의 세계로 영원한 분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히 산다는 것은, 끝이 있는 것에 마음을 두고 살 때는 영원히 살 수 없어요.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은 영원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시편 23편은“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라.” 노래한 것입니다.
목자가 되신 예수님을 뒤따라가며, 예수님의 삶을 채 받아 사는 그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산다고 했어요.
8.
그런데 이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면서 팔복을 얘기하셨죠.
여섯 번째 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했어요.
이 말씀을 여러분 무섭게 들어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을 본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구약으로는 하나님을 본다, 그러면 죽음을 의미합니다.
모세가 “주의 영광을 보게 해 주십시오” 했더니, 하나님께서 “네가 나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출 33:20)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 보여달라고 했을 때, 그의 눈을 가리고 쓱 지나가신 다음에 손을 치우니까,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등만을 보았다는 거 아니에요?
출애굽기 33장 23절에 기록되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복이 있다. 하나님을 본다.” 라고 하십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복이 있는데, 죽는다는 것일까요? 죽음을 말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본다’는 그 자리가, 요한복음 14장에 나온 대로 ‘예수님께서 거처를 마련한 하나님 보좌 앞’이에요.
그러면 하나님 보좌 앞, 영원하신 하나님 보좌 앞에 있게 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그가 천국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이 청결한 사람, 깨끗한 사람이, 보면 죽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을 이젠 보고 영광을 돌리는 그것이, 우리가 영생을 누리는 삶의 자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길이 바로 우리가 우리에게 이웃이 있게 하는 것, 이것을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기도문 하나가 있죠?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가 있습니다.
『주여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저는 우리가 신앙적으로 성 프란시스의 기도문 중, 한 가지만이라도 실천하며 이웃을 가진 삶을 살 때에 우리에게는, 그 놀랍고 은혜로운 신비한 영생이 허락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죠.
영생 주일에. 영생을 누리고, 영원히 사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우리의 믿음의 눈이 뜨여지고, 삶이 열려 이웃을 바라볼 줄 아는 믿음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강석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