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십자가가 있어야
- 등록일
- 2025년 5월 19일
- 설교일
- 2025년 5월 18일
‘십자가(十字架)가 있어야’ 설교 제목은, 말 속에 말이 있다는 말이 있듯,십자가가 있어야 교회라 불릴 수 있고, 십자가가 있어야 살아있는 교회요,십자가가 있어야 올바른 믿음이라는 것을 전하고 싶어, 제목을 정했습니다.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구원(救援)의 방주(方舟)입니다.
‘구원(救援)’이란 무엇일까요?
국어사전은 ‘구원’을 ‘도와 건져줌’이라 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죄악에서 건져냄’이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알고 있는 구원은,‘죄인’(罪人)이 죄의 용서를 받고 심판의 주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받아’, 곧 ‘의인’(義認) 되어 비로소 ‘의인’(義人)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여러분은 세례를 통해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죄인일까요? 의인일까요? 죄의 용서를 받았음에도, 아직도 죄인인가요?
우리는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왠지 찜찜합니다. 왜 그럴까요?
반복적으로 덤벼드는 죄악의 유혹과 시험을 온전히 물리쳤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으려면,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속죄’(贖罪), ‘죄 사함’(赦罪), ‘용서받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罪)에는 세상에서 살면서 지은 죄(罪)도 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원죄’(原罪)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지은 죄는 법에 따라 벌을 받으면 사(赦)할 수 있습니다. 형법(刑法)에 따라 어긴 죄의 값을 씻어내면 흔적은 남지만 죄를 없앱니다. 그러나 ‘원죄’(原罪)는 우리 스스로 사(赦)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속’(代贖)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지만 의인이 되었다는 여기, 죄인과 의인 사이에 대속(代贖)이 있습니다.
대속(代贖)은 은혜입니다. 대속의 은혜로 의인이 됩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죄를 대신 했기 때문에 우리가 의롭다 인정받게 되고, 의인의 반열에 속하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福音)의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1:29에,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이사야 53:5-8의 예언을 떠올린 외침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입을 열지 않았음은,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이 입을 열지 않았다.” 이 예언을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예수께 적용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외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3:16은 “예수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고, 3:17에서는 “예수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받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세상이 구원받게 하려고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이 구원에 십자가(十字架)가 중요합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여, 유월절 어린 양, 희생양이 되어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는 표(表)입니다.
2.
교회란, 어떤 곳일까요?
죄인(罪人)들이 부름받아 하나님의 죄 사함을 받아 의인(義認)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교회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네가 내 아들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 받았으니, 내 아들 예수가 너희 모든 죄를 대신 하였으니, 너희를 의롭다 인정해 주겠다. 의인의 반열에 올라 영생을 누려라.” 하신 복음으로 의인(義人)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늘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죄를 사하여 주심을 믿는다”라고 반복하여 확인하고, 성만찬을 통해 구속(救贖)의 은혜를 늘 감사하고, 찬송가에 ‘십자가 보혈’을 찬송하는 곡이 얼마나 많습니까! 십자가 보혈을 찬송하며 눈물 흘리고, 은혜에 감동하며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십자가 대속(代贖)의 은총을 덧입고, 십자가 은혜로, ‘산 자’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의인(義人)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올바른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 공동번역, ”There is no one who is righteous.
“ Good News Bible) 율법으로는!”
(롬 3:10) 한 것처럼, 율법의 잣대로는 한 사람도 의인이 될 수 없는 죄인입니다. 여기 반어법(反語法)이 적용되는데, 복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십자가 구속의 은총으로! 우리가 죄인으로 복음을 믿음으로, 십자가 앞에 나아가 믿음으로 세례받아 구원받은 의인(義人)이 되었습니다.
누구 죄가 더 큰지? 더 많은지? 죄(罪)는 크기나 숫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죄는 본질상, 누구 것이 더 크고 많은지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됩니다.
하마르티아, 과녁에서 벗어난 화살은 벗어난 것 자체가 문제이지, 멀리 가까이로 평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십자가 앞에서 똑같은 죄인입니다.
설교하는 강 목사를 성직자(聖職者)라 부르지만, 죄인(罪人)으로서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과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이 엄연한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너랑 나랑 똑같으니, 맞먹자 하라는 이야기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서 같은 죄인임을 인정하게 될 때, 서로에게 겸손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 교회 건물 꼭대기와 예배당 중심에 무엇이 있습니까?
십자가(十字架)입니다.
교회의 상징이 십자가(十字架)입니다.
이것은 교회나 교인들에게 십자가(十字架)가 살아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살아있는 십자가(十字架)? 어떤 뜻일까요?
여기에 생화(生花) 화분과 조화(造花) 화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뿌리, 줄기, 가지, 잎, 그리고 꽃, 열매, 열매 나누기를 통해 살아있는 꽃과 죽은 꽃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물을 주면, 살아있는 식물은 자랍니다.
줄기, 가지마다 잎이 무성해지고, 뿌리로 물을 받고 토양에서 영양분 받아 자랍니다.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꿀을 품어 벌과 나비를 부르고, 열매를 맺어, 일용할 열매 하나 외의 많은 열매를 나눕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이 과정이 있습니다.
죽으면, 당연히 모든 과정이 있을 수 없죠.
조화(造花)는 보기에 화려하지만, 꿀도 없고, 벌 나비도 모이지 않습니다. 자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꽃이 없고,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사람이 버릴 때까지 늘 그냥 그대로입니다.
이것을 신앙적으로 비유한다면, 교회와 교인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교회에 십자가가 살아있지 않다면, 조화와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와 교인이 십자가(十字架)에 바르게 연결되어 있으면, 십자가가 공급하는 생명을 받아 생화(生花)와 같게 될 것입니다. 자,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산, 살아있는’ 교회를 원하십니까?
혹시 화려하기만 한 조화(造花) 같은, 죽은 교회, 죽은 신앙을 가진 교회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4.
살아있는 교회를 소망한다면, 십자가 탑을 세우고, 교회당 중앙에 십자가만을 세워놓고, 우리는 할 일 다한 것처럼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살아있는 십자가(十字架)가 있게 해야 합니다.
‘십자가(十字架) 있게 하기’를 성경을 통해 찾아봅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1:28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참다운 평안을 얻게 하는 부름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무거운 짐을 가지고 예수께 나왔고, 예수님 안에 내려놓고 쉼을 얻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위로와 평안과 안식을 누립니다.
그런데 스승이신 예수님은 이어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지신 ‘나의 멍에’는 ‘십자가(十字架)’입니다.
‘십자가 메기’, ‘십자가 지기’를 배우고 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대속(代贖)’, 곧 ‘희생(犧牲)’이요, 타인의 죄를 ‘대신’ 짊어진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입니다.
여기에서 ‘대속(代贖)’은 ‘대신 짊어짐’이요, ‘타자(他者)를 위한 존재(存在)’(Being for others)를 가르칩니다. ‘타자(他者)’는 곧 ‘나의 이웃’을 뜻하는데, 여러 표현이 있겠지만, 예수께서 ‘이웃’이라고 지칭한 사람들을 찾아봅니다.
누가복음 10:29에서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질문에 예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전하시며, ‘강도 만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그가 ‘이웃’이고 “네가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눅 10:36-37) 마태복음 25:35-40 최후의 심판 비유에 따르면,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된 예수께서 주릴 때 먹을 것, 목마를 때 마실 것, 나그네 되었을 때 따뜻하게 영접하고, 헐벗을 때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보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는, 그가 나의 이웃”이라 하셨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하시며,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의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 찾을 때까지 찾고 결국 찾는 목자’가 잃은 양 같은 사람의 선한 이웃이라 하며,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또 누가복음 12장에서는 어리석은 부자가 창고를 크게 지어 곡식을 쌓아두었는데, 그 밤에 그 영혼을 데려가면 많은 소유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시며, “네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않는 하늘에 두는 배낭을 만들라”(눅 12:33) 하셨습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이웃을 아는 사람이라 하겠지요.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신 말씀 따라 올바르게 ‘십자가 메기’, ‘십자가 지고 따르기’를 하게 될 때, 이 사람은 의인이요, 십자가를 살아있게 하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5.
그런데 이 ‘십자가 메기’가 어렵긴 어렵습니다.
바울의 편지에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쓴 이유를 보십시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이것은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고전 3:3)이라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16과 3:23을 보면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성령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너희 안에 시기와 분쟁이 있을 수 있느냐? 질문한 것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도를 따름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곳인데, 어찌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너희에게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느냐? 나 바울이나, 아볼로나, 베드로나 아무것도 아니다.” 꾸중합니다.
“어떻게 거룩한 성전에서 사람의 지혜, 하나님의 어리석음(곧 십자가)보다 못한 바울이니, 아볼로니, 게바니 하는 이름이 들먹여지느냐?” 야단친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래, 좋아. 자, 선택해라.
사람을 앞세워 시기와 분쟁을 택하여 죽을래?
아니면, 그리스도의 것, 십자가를 택하여 살아있는 교회가 되게 할래?”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을 향하여 야단치며 질문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편지를 곱씹어 읽어보면, “분쟁 일으키지 마! 사람 앞세워 싸움하지 마! 십자가 살아있게 해!”
목소리를 높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道) 위에 세워진 고린도 교회가, 죽은 교회로 세상에 지탄받는 것을 너무나 아파하면서, 고린도 교회를 다시 생명을 살리는 살림의 길로 돌이키기 위하여, ‘십자가의 도’ 뿐이라 가르쳤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
(고전 2:2) 하였습니다.
6.
광염교회 교우 여러분,여러분은 여러분의 교회, 광염교회에 십자가가 살아있다고 믿으십니까?
소리 내어 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마음의 소리로 성령께 답하시면 됩니다.
여러분의 믿음 생활에 십자가의 도가 활동하고 있다고 믿으시나요?
양심적으로 판단하고, 역시 마음으로 성령께 답하시면 됩니다.
혹시 두 질문에 “아니다”라 판단하신다면, 오늘 이 순간부터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신 예수님 앞에 서서 ‘무릎 꿇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멍에 메기의 한 예를 말씀드립니다. 요한복음 13:12-15,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전 마지막 만찬을 행하신 저녁에,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내가 주,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다. 내가 본을 보였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인데,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었습니다. 발을 씻으려면? 무릎 꿇어 엎드려야 합니다. 고개 숙여 발 씻어 주는 사람을 높여야 합니다.
‘겸손해 지기’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본보여 주신 ‘십자가 지기’요, ‘멍에 메기’와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라.”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에 따라, 우리는 거룩해져야 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시고 낮추시어 사람이 되신 다음, 오직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되살려내려는, 화평(和平)의 십자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이 교회에 십자가가 살아있게 하는 길이라고 믿으면서,여러분 안에 십자가가 살아있는 주님의 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기도하시죠.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으면사람 되어 무릎 꿇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며십자가에 달려 대속 제물이 되셨습니까!
우리의 신앙과 교회가 어떻게 해야 사는 것인지 가르쳐주셨으니이 걸음 올바르게 걸어가는 저희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강석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