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내가 희망이다.
- 등록일
- 2025년 2월 25일
- 설교일
- 2025년 2월 22일
제가 설교를 거의 50년 가까이 했는데, 설교하기 전에 박수 받아본 것이 처음인 것 같아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굉장히 어려웠었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주제로 삼아야 할 것인지, 말씀을 나눌 분들에 대한 전 이해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학생이다. 그리고 자기가 태어난 곳을 떠나 대한민국에 정착하면서 어려움이 있었겠구나.
상황을 짐작하여 주제를 맞춰보니까, ‘절망’이라고 하는 단어가 먼저 떠오르더군요.
좌절과 절망.
여러분들이 이 과정을 겪으면서 오늘을 맞이하고 있겠구나, 생각하면서 절망하고 좌절하는 분들에게는 무슨 말씀이 제일 좋겠어요?
역시 ‘희망’의 이야기지요.
그러면서 제가 목회를 50년 가까이 했는데, 나의 목회가 무엇이었을까를 되돌아보게 됐어요.
여러분 덕분에 저를 되돌아보게 된 거죠.
목사는 쉽게 얘기해서 구원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우리에게 주신 분일까?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다”라고 고백하는데,구세주라고 하는 게 무엇에서부터의 구원이라는 말인가? 질문들이 새록새록 가슴속에서 일어나면서, ‘예수님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절망, 좌절, 죽음, 죄악, 어둠의 사슬에 매여 사는 사람을 생명으로 삶을 전환하여 주는 일이라고 생각해 볼 때,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의 얘기를 전해도 틀리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저 자신이 구원의 메시지를 전한 사람으로서결국은 ‘예수님의 얘기를 전하는 사람으로 희망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고, 교인들한테 나눴던 사람이구나’ 하는 나를 돌아보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희망이다”라는 제목을 정했습니다.
여러분들 한 사람이 오늘 제 이야기를 듣고 “내가 희망이다.” “내가 세상에 희망이 되어야 하겠다.” 이런 마음을 간직하고 산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올바르게 따르는 사람입니다.
오늘 ‘십분 메시지’를 전하신 지강유철 선생님이 ‘장기려 박사님 평전’을 쓰셨다고 해서 너무 반갑고 기쁜데요.
장기려 박사님이 이 세상을 사셨던 삶이 뭐냐? 그가 희망이 되었다는 겁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었다는 거예요.
이렇게 볼 때에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희망을 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제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나가려고 하니까 마음을 나눠 주길 바랍니다.
나는 6⋅25 이후에 가난했던 시절을 지냈어요. 1948년생이니까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해에 태어났어요.
그리고 1⋅4후퇴 때 양평에서 거제도로 피난을 갔습니다.
양평에서 대구까지는 걸어서 갔어요.
어린 나를 업고 대구까지 가신 어머니 덕분에 난 살았습니다.
그 당시 혹독한 추위에 버린 아이들 너무나 많았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국민학교 6학년 때 4⋅19 학생 혁명을 경험했는데, 학교에서 수업 중에 총소리 들리고 유리창 깨지는 것을 직접 경험했어요. 5⋅16 군사 쿠데타로 군사독재 시절을 겪었습니다. 정말 우리나라가 가난했습니다.
북한으로부터 전기를 공급받았습니다.
그때는 북한의 국민 소득이 남한보다 훨씬 더 높았던 때죠.
그런 시절을 겪으면서 이 나라가 경제적으로 부흥하고 발전하고, 교회도 번성하는 과정을 몸으로 겪었는데, 이러한 격변의 시대를 지난 나 자신을 돌아보니 나의 삶 속에도 절망했던 때가 있었고 좌절했던 때가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목사로서 좌절하는 일들을 경험하면서 무엇으로 나를 추슬렀던가?
무엇으로 절망을 극복했던가?
나의 경험을, 그 경험을 통해서 깨달은 것을 여러분들과 나누려고 하는 겁니다.
2.
오늘 누가복음 15장을 살펴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께 가까이 나와 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향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라고 했습니다.
이 기록이 예수께서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 상황입니다.
비유 세 가지는 잃은 양을 찾는 비유, 잃어버렸던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 그리고 잃었던 아들을 찾는 비유인데, 세 비유가 나오는 전 상황이 세리와 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바리새인들이 등장합니다.
세리와 죄인이라고 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난 그 시대 속에서, 절망과 좌절을 겪는 사람들이라고 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게 많아요. 그리고 존경도 받아요.
그러나 세리나 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며, 멸시와 손가락질을 받으며 소외당합니다. 그러니 절망과 좌절 속에서 하루하루를 삽니다. 이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바리새인을 향해서도 하신 말씀이기도 하지만 나는 세리와 죄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봅니다. 세 번째 비유에서 돌아온 아들을 향해서 불평하는 형에게“너의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 아버지의 마음을 담아 주면 좋겠습니다.
비유의 상황은,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여서 음식을 같이 먹는 걸 보고 바리새인들이 불편한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아, 저 예수라는 사람은 도대체 뭐냐? 죄인들과 함께 술도 먹고 음식도 나누는 이런 사람이다.” 비난(非難)한 겁니다. 그런데 이 세리와 죄인은, 정말 그 시대에서 상대적인 약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절망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제도에 의해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편안하게 사는 아흔아홉 마리가 아니라,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은 것을 기뻐하시면서 잔치를 베풀고,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시는 분이 하나님이고, 바로 나라고 얘기해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세리와 죄인같이, 구박받고, 절망하는 사람들한테,“내가 희망이다.”
이 말씀을 해주시는 것이죠.
3.
세 번째 비유를 봅니다.
어떤 부잣집에 아들 둘이 있었습니다.
맏아들은 그냥 아버지 말씀 잘 듣고 아버지 하라는 대로 하는데, 둘째 아들은 형과는 달랐습니다.
“도저히 못 견디겠어.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틀은 숨 막혀.”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납니다.
떠날 때 그 마음은, 자기 나름대로 꿈을 이룰 수 있겠다 하고 떠났는데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알다시피 돼지우리에서 지내게 됐어요.
시간이 지나, 아버지 집을 떠났던 둘째 아들은 떠날 때 가졌던 돈이 떨어지고, 꿈꾸던 것이 실패합니다. 나락에 빠져들고 돼지우리에 살면서 돼지 먹이로 배고픔을 채웁니다.
자기를 돌아봤겠죠. 돌아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죽어버릴까? 죽는 게 차라리 나아.
내가 어떻게, 어떤 아들로 자랐는데? 내가, 이 모양이 됐어. 죽자.
죽음을 눈앞에 두며 절망에 빠집니다.
돼지우리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떠오른 곳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게 어디일까요?
바로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을 향해서 갑니다.
어떻게 갈 수 있었냐?
돼지우리에서, 자기 발목을 보니까 착고(着錮)가 보입니다.
발목에 묶어두는 쇠고랑입니다.
이건 뭐지?
둘째 아들은 언제부터인지 자기 발목에 채워진 쇠고랑을 발견하곤 놀랍니다.
만져보니 거기에 보이지 않던 끈이 연결되어 있어요.
이건 뭐야? 끊어 보려고 했더니 안 끊어져요.
쭉 당겨봤고, 그것을 잡고 돼지우리를 떠나 따라가 보니, 마지막에 닿은 곳이 어디였을까요?. 아버지 집이었어요.
아버지를 거기서 만난 거예요.
제가 이 그림을 그린 건데 거기에 누가 있었느냐?
엎드려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뭐 어머니라도 좋아요. 기도하는 어머니가 계셨다.
아니면 우리,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사람 있어도 좋겠어요.
기도해 주는 친구들이 되어도 좋습니다.
아니면 최 목사님이나, 지 선생님이나, 이런 분들입니다. 돼지우리라고 하는 곳에서 먹는다는 것은 절망적인 삶을 비유하는 것이죠그때 발목에 끊어지지 않은 쇠사슬이 묶여서 아버지 집에까지 갔다 하는 그 쇠사슬이 뭐냐?
신앙적으로 얘기할 때 이것이 계약(契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는 계약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곧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제자로 살기를 약속하는 신앙고백으로 서로를 묶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이, 예수님과 우리와의 사이를 묶는 것이 계약인데, 이것은 끊어지지 않아요.
우리가 삐뚤어져 갈 때에도, 우리가 유혹의 시험에 빠져 다른 길을 걸을 때도, 내가 절망할 때, 그때에도 이 계약은 파괴되지 않는다고 하는, 그것이, 성서가 얘기하는 계약의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 얘기하면 사랑이라고도 하고, 또는 긍휼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바로 이 둘째 아들은 자기 발목에 채우는 쇠사슬을 따라가면서 아버지 집에 도달하고 아버지의 긍휼(矜恤), 사랑을 회복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회복, 절망에서 희망으로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이 예수님의 세 번째 비유에 담겨있는 내용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주시는 메시지는, 절망 속에서 좌절하는 우리에게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마, 희망이 있어”라고 하십니다.
이 비유를 얘기했을 때 누가 옆에 있었느냐 하면 제자들도 있었어요.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들이 다 희망이 되어야 해”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저는 비유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4.
이제 우리 시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죠. 여러분이 살아가야 할 이 시대를 생각해 보면, 마가복음 1장 1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은 복음서에서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며 첫 번째 하신 말씀인데,“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저는 이 말씀을 복음서에서 가장 핵심적인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때가 찼다”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때’가 어떤가 하고 봤더니,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왔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은, 이 세상이 망하는 때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시대는 절망의 시대라는 거예요.
물론 예수님이 보신 것은 Pax Romana(로마의 평화), 로마라고 하는 제국주의가 다른 나라들을 지배하고 힘으로, 무력으로 통치하면서 “평화롭다”라고 하는 가짜 평화가 지배하던 때이고, 또 예루살렘 종교가 형식과 제도에 묶여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것을 사람들이 가로채는 이러한 시대로 신앙적인 절망감을 맛보던 때죠.
이러한 때에 예수님은 그때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때다.
절망의 시대다, 죽음의 시대다, 어둠의 시대다, 이렇게 말씀한 것이죠.
종말의 심판만 말씀한 게 아닙니다. 거기에서 너희들 다 자빠져 죽어라. 심판받아라. 한 것이 아니고, 살길을 열어주셨는데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 자신이 복음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구원받는 길이요, 이것이 이 심판과 종말 시대의 희망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죠.
그래서 이러한 말씀이 제가 목회하면서 겪었던 모든 절망들을 이겨낼 힘이 된 말씀이었다는 깨달음을 드리는 겁니다.
제가 몇 가지 자료를 가져왔어요.
우선 이 그림은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가 그린 그림이에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나오는 강도 만난 사람을 자기 나귀에 태워 안전한 곳으로 데려갑니다. 이 비유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강도 만난 사람에게는 이 사람이 희망이죠.
예수님이 이 비유를 얘기하시는 것은 강도 만난 사람, 소위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네가 희망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왜 제가 고흐 얘기를 말하느냐 하면.
고흐가 이 그림을 그릴 때 37살이었습니다.
37살에 죽었는데. 죽기 6년 전부터 그린 그림이 유명한 그림들이 많아요. 그중의 하나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 그림입니다.
1890년 고흐가 세상을 떠난 해인데 그가 정신병으로 입원해 있던 병원에 그 병실에.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1798–1863) 라고 하는 사람이 그린 그림이 병실 벽에 있었어요. 들라크루아의 대표적인 유명한 그림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상’(1830년 작)이에요 들라크루아가 그린 ‘선한 사마리아인’ 그림을 1890년에 고흐가 그렸어요. 병원 병실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 고흐가 모작(模作)했습니다. 고흐의 까마귀 떼가 들판을 나는 그림 ‘까마귀가 있는 보리밭’을 마지막 그림이라고 하지만, 나는 선한 사마리아인 그림도 마지막 그림에 속한다고 봐요. 그러면 목사가 되는 것을 꿈이었던 고흐가 그의 생이 마지막 때가 가까이 온 걸 안 그때 그렸을까요? 목사의 상상력입니다. 그는 예수의 비유에서 위로를 받고, 복음을 통해서 희망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증거로 보여주는 글이 있어요.
여동생 윌에게 쓴 편지입니다.
“사람도 곡식에 비유할 수 있다. 한 알의 곡식에도 싹을 틔울 힘이 있는 것처럼,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사람에게도 그런 힘이 있다. 자연스러운 삶이란 싹을 틔우는 것이거든. 사람들이 싹 을 틔울 수 있는 힘은 바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겠지.”
예수님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라고 한다면, 예수님이야말로 사랑 그 자체인데, 이렇게 볼 때에 이미 고흐는 1888년에 ‘씨뿌리는 사람’ 그림을 사랑을 뿌리는 것으로 그린 것이며, 여동생한테 편지를 쓰면서 ‘선한 사마리아인’, 이 사람을 통해서 자기의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어둡고 힘들었던 것을 극복하는 소망과 희망을 사랑에서 얻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제가 다시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하는데,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입니다.
렘브란트의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가 돌아온 아들에 대한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렘브란트 생애 거의 마지막 작품이에요.
렘브란트는 1669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그림을 1668년~1669년 2년 사이에 완성합니다. 유화로서는 마지막 작품이라고 봐요. 렘브란트는 1936년, 30살 되는 때 탕자의 비유를 그립니다.
그리고 36세 되는 때에도 탕자의 비유를 그렸어요. 그리고 그의 생애 마지막 때인 62세와 63세 사이에 바로 이 유화를 그립니다.
나는 나름대로 생각하기를, 30세에 처음 탕자의 비유를 그렸는데, 왜 유화를 그의 생애 마지 막 때에 그렸을까? 렘브란트 역시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자기 삶의 희망을 얻은 것이 아닐까? 33년 동안 가슴에 품었던 그림을, 그 세월 동안 마음에 품고 기다리는 아버지이신 그리스도의 그림을 완성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상상을 했습니다.
자신의 인생 마지막 때에 유화를 완성한 그 마음을 헤아려 볼 때에, 렘브란트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희망을 얻었고, 이 그림을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바로 렘브란트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비유들은 모두 다,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어둠과 유혹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희망임을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죠.
5.
제가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혹시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절망스럽고 좌절하는 경험이 있다면, 없을 리 없습니다, 있다고 봅니다. 낯선 곳에 와서 적응하는 것도 그렇고, 또 혹시 고향에 가족들이 있다면 그리움에 대한 슬픔도 애탐도 있을 것이고, 그때 절망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을 압도하고 희망을 짓누르고 있게 될 때, “노래 하나를 부르십시오”하고 말씀드려요. 김강태 시인의 시 ‘돌아오는 길’인데 한번 들어보세요. 『춥지만 우리, 이제 절망을 희망으로 색칠하기 한참을 돌아오는 길에는 채소 파는 아줌마에게 이렇게 물어보기 희망 한 단에 얼마예요?』 그런데 이 시를 장사익 씨가 ‘희망 한 단’이라는 노래로 바꾸어서 불러요. 『춥지만, 우리 이제 절망을 희망으로 색칠하기 한참을 돌아오는 길에는 채소 파는 아줌마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아줌마, 희망 한 단에 얼마래요 희망유? 나도 몰라유 희망 한 단에 얼마에유 희망 한 단에 얼마에유 희망 한 단에 얼마에유 희망유? 채소나 한 단 사가슈~ 선생님~』 채소 파는 아줌마에게는, 채소 한 단이라도 사 가는 사람이 희망일 겁니다. ‘내 희망을 찾는 것에서,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는 곳에서, 세상은 희망이 있고, 그곳에서 바로 내가, 여러분이 희망이 된다는 겁니다. 저는 이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드리면서, 제가 정말 좋아하는 시인이에요. 올리브 하우게(Olav H. Hauge 1908–1994, 노르웨이)라고 하는 시인이 있는데, 이 시인이 수십 년 동안 아주 척박한 곳에 나무를 가꾸어, 그곳에 시냇물이 흐르고, 새가 깃들고, 숲속에 온갖 동물들이 함께 사는 곳으로 바꾸며 시를 쓴 분입니다.
시인의 대표적인 시 ‘어린 나무에 눈을 털어주다’ 입니다. 『눈이 내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춤추며 내리는 눈송이에 서투른 창이라도 겨눌 것인가 아니면 어린 나무를 감싸안고 내가 눈을 맞을 것인가 저녁 정원을 막대를 들고 다닌다 도우려고. 그저 막대로 두드려주거나 가지 끝을 당겨준다. 사과나무가 휘어졌다가 돌아와 설 때는 온몸에 눈을 맞는다 얼마나 당당한가 어린 나무들은 바람 아니면 어디에도 굽힌 적이 없다, 바람과의 어울림도 짜릿한 놀이일 뿐이다 열매를 맺어 본 나무들은 한 아름 눈을 안고 있다 안고 있다는 생각도 없이.』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요.
이번 1월에 눈이 무진장 왔잖아요. 그때 나무 부러지는 소리를 너무 많이 들었어요. 백련산이 바로 집 옆에 있는데 밤중에 꽈다닥 꽈다닥 눈 무게를 못 이겨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였어요. 그래서 하우게는 숲을 가꾸면서 눈이 많이 오면 작대기를 들고 다니면서 어린 나무 가지에 눈을 털어주는 거예요. 어린 나무 가지를 살려주는 거죠.
이 몸짓이 생명 살려가는 희망의 몸짓입니다. 이런 것이 생명에 대한 경외(敬畏)와 사랑입니다. 이것을 품고 사는 사람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고,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땅에 엎드려서 기도 하는 아버지가 될 수 있고. 이런 분이 “나는 너를 절대 놓지 않아. 너를 절대 포기하지 않아.”
라고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실까 생각하고. 이러한 하나님의 심장을 가지고 사는 사람으로 내가 그렇게 살면 내가 희망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내가 희망이다.” 소리치는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의 세상은 너무 절망스럽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나 하나라도 어린 나뭇가지가 눈의 무게 때문에 부러지지 않도록 막대기로 치는 심정으로, 좌절하는 심정을 가진 이들이 하나님 품에 들어와서 희망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한 사람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제 여생을 이렇게 방향을 잡으면서 저의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드립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희망입니다.
강석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