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밥상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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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갑교회 성도 여러분, 제가 지난번에 온 것이 4월 28일이었어요. 이제 반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샬롬.
인사말에는 그 시대상이 담겨있습니다.
우리나라가 6·25전쟁을 겪었는데 6·25전쟁 동안 또 그리고 그 직후의 인사말은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밤새 별고 없으셨습니까?” 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인사말에는 우리나라가 이념전쟁으로 우리 민족이 가졌던 아픔이 그 속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낮에는 국군의 편 들어야 하고 밤중에는 인민군 편을 들어야 하고, 이렇게 해서 낮에는 낮대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있고, 밤에는 밤대로 고통을 당해요.
그래서 다음 날 아침이 오면 못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별고 없으셨습니까? 이런 인사말이 있었죠.
어느 사이 50년이 됐는데, 제가 대구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는 친구들끼리 한 인사가 뭐였느냐 하면 “밥 먹었나? 밥을 먹었느냐?” 이게 아침 인사에요.
나는 그 걱정을 안 했었는데, 학교에 가보니까 실제로 도시락도 없이 아침을 굶고 오는 친구들이 의외로 많았어요. 인사말로 “밥 먹었나?” 할 때, “안 먹었다, 못 먹었다.” 하면 도시락을 나눠줘도 되는데, “안 먹었다.”라는 얘기는 없죠. 집에서 아침 그냥 물 한 컵 마시고 굶었지만, 그래도 “밥 먹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게 남자들의 자존심이었다는 것이죠.
“밥 먹었냐?” 이 인사말 속에 담겨있는 것은 가난했던 때, 우리나라에 보릿고개가 있었던 때의 그 시대상을 반영하는 인사말이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보릿고개가 있었던 고등학교 때 유명한 아재 개그가 있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하도 굶고 다니는 애들이 많으니까, 그때 중국음식점에서 곱빼기 짜장면 먹는 것이 제일 행복한 때였어요. 교회에 다니면 교회에서 밥을 잘 주잖아요. 하루는 예배드린 다음에 선생님 한 분이 친구들 데리고 중국음식점에 갔는데, 배 터질 만큼 먹으라고 했더니, 한 친구가 짜장면 6그릇을 먹었어요. 6그릇이나 먹고 너무 배가 불러 문턱에 걸려서 팍 넘어졌지요. 넘어졌을 때 한 말이 뭐냐면 “아이 씨. 밀가루가 근기가 없어서 금방 배가 꺼져 넘어졌다.“라고 했답니다.
이렇게 우리 인사말 속에 그 시대상에 담겨있다고 하는 제가, “여러분에게 지난 6개월 동안 평안하셨습니까?“하고 물은 것은,
요즈음 하도 나라가 어지럽고 경제가 너무 힘드니까 우리의 삶이 평안하지 못한 것 같고,
얼굴들을 보면 어깨가 무겁고 너무 고생스러워 뭔가 찌들어있는 것처럼 보이며,
적은 돈을 벌기 위해서 너무 고생을 하니까 얼굴이 펴지지 않게 되는데,
그래서 우리의 삶이 팍팍하고 자꾸만 사람 사이에 정이 사라지고 있어 편안하지 못한 것 같아서, 저는 여러분들이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주 안에서 참 평화로우시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안부를 물은 것입니다.
2.
목사님께서 오늘 설교 제목이 묘하다 그랬어요.
‘밥상 앞에서’.
제가 오늘 얘기를 몇 가지 할 겁니다.
부엌에 가면 참기름 있죠?
어느 여신도 한 분이 제게 참기름 한 병을 주셨어요.
시골에서 농사하시는 우리 엄마가 밭농사를 해서 참깨를 키웠고, 참깨를 거두어 깨를 털고, 방앗간에 가서 기름을 짜서 가져온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었을 때, 시골에서 친정어머니가 직접 만들어 온 그 참기름 냄새가 벌써 상상이 되었어요.
참기름을 선물한 여신도 분이 50이 지난 분이에요. 그러면 그 어머니는 몇 살 됐겠어요? 80이 지났겠죠. 80이 지나신 분이 이른 봄부터 가을 참깨를 거둘 때까지 고생하시고 노력하셨던 농사 짓던 그 모습이 그대로 눈에 선하게 보이는 거예요.
왜? 집 옥상에 텃밭이 있어서, 나도 깨를 키워 깨알을 병에 집어넣어 집사람을 기쁘게 해준 적이 있었거든요.
80 넘으신 나이 드신 어머니가 쪼글쪼글해졌겠죠. 밭일하면서 햇볕 때문에 얼굴도 그을렸겠죠. 그래도 딸의 가정을 생각해서 깨를 키우고. 밭에 채소나 김장할 거리, 상추, 고추, 오이, 가지, 토마토, 이런 것들을 때맞춰 딸 집에 보냈을 거예요.
나도 옥상의 조그만 텃밭인데도 정말 많은 손이 많이 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렇지만 수고한 대로 식탁이 풍성해지죠. 상추로부터 시작해서 방울토마토를 어제 마지막으로 땄어요.
나는 친정어머니의 수고를 알아요.
이런 봄에 전 해에 갈무리해 둔 참깨 씨앗을 뿌리고, 깨가 자라는 동안에 깻잎을 따서, 간장에다가 졸여서 딸네 집에 보내고, 그것도 차곡차곡 쌓아야 되잖아요. 정성이 들어가야 돼요.
또 어떤 거는 된장 속에 쑥쑥 박아놓아요. 그러면 얼마나 맛있는 깻잎이 되는지!
그리고 가을 추수 때가 되어, 참깨밭에 마른 참깨 가지를 자릅니다. 멍석을 깔아놓고 ‘톡톡 톡톡’ 털면 작고 작은 깨알이 떨어져요. 이걸 다시 모읍니다. 모아서 씻어요. 말린 후에, 빻기하고 으깹니다. 빻은 가루를 꽉 누릅니다. 으깨지면서 기름이 나오는 거예요.
그것을 기름을 나왔다고 다 쓰는 게 아니라, 한번 천을 대고 거르지요.
이렇게 많은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을 병에 넣어 “내가 만든 참기름이야.” 하고, 딸네 집에 보낸 것이죠.
요만한 참기름 담은 병 속에 참깨가 몇 알 들어갔을까요?
상상해 보세요.
수천 알?
일부러 한번 세어봤어요. 100개 정도 됐는데, 100개 해도 새끼손가락 손톱만도 안 돼요.
참기름 한 병 나오려면 얼마 정도 필요할까요?
100만 알은 넘을 것 같아요.
한 병의 참기름이 굉장한 거예요.
한 알의 씨앗, 이 참깨 한 알의 씨앗, 그 안에 생명이 있어요.
땅에 묻으면 또, 깨가 되는 그 생명 100만 알이 한 병 속에 담겼다고 생각을 해 보니까, 이 참기름 한 병이 너무나 귀하고 귀한 거예요.
3.
아, 비단 참기름만 그렇겠어요?
들기름도 같습니다.
두부 한 모 만드는 과정을 봤어요?
물고기 한 마리 바다에서 잡으러 어부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아십니까?
금방 냉동을 시키고, 항구에 도착해서 경매하여 팔고, 주부가 시장에서 구매해서 손질하고 여러 가지 양념 넣어 요리하여 밥상 위에 올라오는 거예요.
쌀은 88번의 손길이 닿는다고 해서 쌀 미(米) 자가 88이에요.
이렇게 생각을 해 보니까
참기름, 조그만 병에 담긴 거 하나에 너무나 많은 수고가 담긴 귀한 선물이었구나.
하는 것을 저는 경험했습니다.
이 수고를 생각하면서 밥상을 봤어요.
밥, 콩나물국, 장조림, 고추장, 감자볶음, 계란말이, 김치, 이 밥상에 올라온 음식들 하나하나가 다 많은 수고와 헌신과 생명이 담겨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들이 예사롭지 않은 거예요.
이것뿐이었겠어요?
사람의 수고만이 아니라, 농부의 수고와 어부의 수고만이 아닙니다.
50여 년 전에 이런 노래를 여름 성경학교 때 아이들하고 같이 불렀어요.
“오이밭에 오이가 길쭉길쭉. 보기 좋게 열렸네, 잘도 열렸네.
저 혼자서 컸을까 아니 아니죠. 위에 계신 하나님이 키워주셨죠.”
들어보셨어요?
어린이들과 부르면서 ‘길쭉길쭉’하면, 애들이 대단히 좋아해요.
여기에 채소나 과일 이름을 들어 부르면 다 되죠.
배추밭에 배추가 불끈불끈, 무밭에 무가 울퉁불퉁, 사과밭에 사과가 똥글똥글, 포도밭에 포도가 땡글떙글, 이름 붙이면 다 되는데, 자연 속에 두신 하나님의 은혜가 작고 작은 깨 한 알 속에 담겨있는 거예요.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햇볕이 비치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밥상 속에 풍성합니다.
그러니까 밥상을 받은 다음에 보니,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다가 요즘 인기 있는 ‘흑백 요리사’ 나는 그냥 예고편만 봤더니, 칼로 생선을 저미는데 보통 기술이 아니에요.
실은 우리의 어머니들, 여성들이 그 음식 만드는 거 보면 정말 다 1등 요리사입니다.
무와 배추를 자르고, 소금 적당히 넣고, 고춧가루 한 줌 뿌리고 그냥 버무렸는데, 저울에 올려놓고 몇 g인지 재지도 않아도 얼마나 맛깔스럽게 김치가 되는지 놀랄 뿐입니다.
고추장 좋아하나요?
고추장 밥상 위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고생이 많은지 압니다.
된장, 이것도 메주를 많이 주물러야 맛있게 찰지게 됩니다. 어깨가 아프도록 주무르고, 소금하고 1:1로 섞고 또 몇 날 며칠을 기다리고, 때론 파리 오지 못하도록 쫓아야 하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된장, 간장, 고추장입니다.
밥상 위에 오른 모든 것이 그냥 된 게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밥상 앞에서 제가 느낀 건 뭐냐 하면, 밥상은 한마디로 ‘생명 잔칫상’이라는 것입니다.
왜? 어머니가 수고하는 그것도 시간과 재능을 나눈 거예요.
밥을 만드는 동안 내 시간, 내게 주신 생명을 그 안에 투자하는 거예요.
레갑교회 목사님이 나한테 일터에서 땀 흘리는 사진 보내왔더라고요.
그렇게 땀흘려 일당을 받습니다.
우리 라오스 친구들, 일당 7만 원을 벌기 위해서 땀을 냈는데, 번 다음에는 어디다 써요?
먹고 사는 데 쓰는 거예요.
그러니까 먹는 것 속에 무엇이 들어있어요?
내 시간이 들어가는 거니까, 시간이라고 하면 생명이잖아요. 생명.
그래서 이 자그마한 밥상 앞에서 우리는 수고한 많은 사람의 수고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또 이것을 키워주신 모든 손길 속에 감사하는 그 감사의 잔치, 이것이 밥상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종의 의무요, 책임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4.
그런데 단순하게 밥상만 그럴까? 저 자신을 생각해 봤어요.
제 나이가 76이거든요. 많이 먹었죠?
요즘 와서 나 자신을 봤더니,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76년을 산 내 인생 모든 것 속에
아주 촘촘하게 채워진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구나.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고,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고,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것이 있었고,
나를 하나님이 지지해 주신 것도 있었고,
하나님이 나와 동행해 주신 걸음도 있었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끌어주셔서 나름대로 목회를 잘하고, 은퇴 목사로 오늘 교회에 와서 설교할 수 있게 된 것도, 목사님을 만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 중 하나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를 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져 있다고 하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음식만 아니에요.
하나님의 손길만 내 속에 있었는가 했더니 아닙니다.
여러분, 태어나 누가 키워줬어요?
부모님이 계셨죠? 벗들도 있었고 스승도 있었고 형제도 있고 믿음의 가족들도
내 삶의 빈틈마다 사랑을 채워주고,
내 삶의 빈틈, 고통스러운 자리마다 위로를 채워놓은 많은 사람이
내 안에 자신의 시간을 주고 재물을 주고 마음을 주었다는 걸 보니까,
나라고 하는 존재도, 그냥 저절로 여기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도 채워져 있지만, 내 주변에 수많은 사람의 사랑과 위로와 품음과 함께, 기도해 주는 기도가 내 안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사람이 하는 말, 행동, 눈길 하나하나, 그 속에 다 그의 생명이 담겨있는 거예요.
시간을 주기 때문이죠.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부분도 내 시간을 사용해서 모여 예배드리는 거예요.
이 시간 역시 우리가 자신의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밥상만이 아니라 밥상을 받은 나 자신도 내 모든 것이 은혜로 채워져 있었구나.
그것도 다른 사람이 생명을 줘서 나를 여기에 있게 해준 거구나.
그래서 다시 나를 돌아보니까.
아하, 나라고 하는 이 존재는, 나를 위해 모든 이들이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준 것으로 채워진 존재구나 하는 것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옆 사람들 보세요. 얼굴 보세요. 눈을 보세요. 여러분들 옆에서 같이 예배드리는 믿음의 형제들, 이 교회를 이끌고 가시는 목사님, 어느 한 분 귀하지 않은 분이 없습니다.
나만 귀하다는 얘기 아닙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귀해요.
어쩌다 보니까 여기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성령께서 이끌어주셨고, 하나님이 어떤 계획에 의해서,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이 생명 나눔의 잔치마당이 여러분이 함께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어떤 만화가가 이런 만화를 그렸어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제목입니다.
사춘기에 다다른 딸이 어느 날, 사춘기라고 하는 게, 부모에게 반항하고 반발하고 불평하는 것, 그러는 게 사춘기잖아요.
여러분은 그런 시기가 다 지났어요.
다 지냈기 때문에 내 말 이해할 거예요.
사춘기에 다다른 딸이 엄마한테 “엄마 아빠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어?” 하고 대들었어요.
그런데 엄마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드디어 때가 왔구나’ 하는 표정으로 자기의 귀한 물건들을 챙겨놓은 창고 문을 쓱 열더니, 거기에서 아들딸이 초등학교 때 쓴 그림일기들, 매일 써서 선생님이 검사하고 동그라미 5개 주기도 한, 그 일기장을 다 꺼내더니 딸 앞에서 읽어줍니다.
그 일기장은 누가 썼어요? 딸이 초등학교 다닐 때 쓴 것이죠.
오늘, 엄마가 나한테 예쁜 옷을 사주셨다. 너무나 고마웠다.
오늘은 아빠가 나와 함께 놀아주셨는데 너무 즐거웠다.
뭐, 이런 소소한 일들이죠. 엄마가 학용품 사주셨다. 엄마가 뭐를 해줬다.
내가 아플 때 엄마가 밤새도록 나를 업고 나를 두들겨줘서 내가 빨리 회복이 되었다.
이런 내용들이 일기장에 다 나오는 것입니다.
엄마는 딸에게 일기장을 내밀며 “이것이 증거물이야. 뭐? 내가, 엄마 아빠가 아무것도 안 해줬다고? 내 이럴 날이 올 줄 줄 알았지.”
생각해 보십시오.
내 삶 속에 이러한 은혜가 없이 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예를 세어보면 끝이 없어요. 나라고 하는 존재가 이렇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정할 건 인정합시다.
5.
자, 여기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성만찬, 예수님이 제정해 주신 성만찬이 참 귀중한 예식입니다.
개혁교회는 가끔 하지만, 지금도 가톨릭교회는 매번 미사 드릴 때마다 성만찬을 행합니다.
마가복음 14장은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에 대한 말씀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하는 화가가 그린 최후의 만찬, 유명한 그림이 있죠.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하고 있는데, 가룟 유다는 맨 구석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의 동안에 세 번,
“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어야 하고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다.”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직접적으로는 세 번이지만, 예수님의 공생애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매 순간을 마지막처럼 사셨어요. 그런 것이 곳곳에 나타납니다.
정말 최선을 다하고 치열하게 사셨는데, 드디어 이제 자신의 때가 온 것을 아신 예수님이 마가의 다락방에 오셨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최후의 만찬을 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이라고 한 것 아니에요.
성경에 ‘최후의 만찬’이라고 쓴 것은, 나중에 써놓은 것이지, 예수님은 그냥 만찬을 했습니다.
만찬을 준비하시고 제자들 발을 씻어주시고서, 떡을 나누시고 포도주잔을 나누셨는데,
떡을 나누시면서 하신 말씀이 “이것은 내 몸이다.”
또 포도주잔을 나누시면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하면서,
제자들에게 떡을 “받아먹어라.” 포도주를 주면서 “받아 마셔라.” 그랬어요.
‘마지막 만찬 때’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마지막’ 말이라 하면서 들으면, 보통 그 말을 뭐라 그래요?
마지막 때 한 말은 ‘유언’(遺言)이죠. 또는 ‘유훈’(遺訓)이라고도 해요.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내 피다.”라고 하신 이 말씀.
바꾸어 얘기하면 “받아먹으라. 이 떡이 내 살이다. 받아 마시라. 이 포도주가 내 피다”라고 했는데, ‘받아먹고 마시라’는 얘기는 바꾸어 얘기하면 “나를 먹어라, 나를 마셔라”는 얘기죠.
예수님의 말씀, 참 기이(奇異)하네요. 기이한 얘기예요.
마지막 만찬 ‘밥상 앞에서’ 한 말씀입니다.
‘밥상 앞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그 말씀이 “나를 먹어라.” 이렇게 얘기하셨어요.
기이한 말씀입니다. 이상한 얘기에요. 세상에!
그래서 이것을 따라 했던 초대교회가 오해받았어요.
카타콤에 숨어서 모인 교인들이 예배드리는데, 로마 사람들이 밖에서 들어보니까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내 피다.” 합니다.
그러고서는 먹고 마시고 “할렐루야!” 하는 거예요.
들리는 소리만 들으면서 “이야! 기독교인들은 식인종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말만 들으면 그렇죠.
그런데 도대체 “이 떡과 잔을 먹고 마셔라.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어떤 뜻이 있을까요?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에요.
이후, 예수님은 찬미하는 제자들과 감람산을 올라가다가 붙잡혀서, 더 이상 이 땅에서 식사를 못 하십니다.
회초리로 맞고 다음 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거예요.
6.
그러면 예수님은 자신이 죽을 걸 아시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한 것인데, 왜? 이런 말씀을 남겼을까요?
“날 먹어야 산다”라고 한 것일까요?
예수님은.
떡과 포도주 이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밥상 위에 올라왔는지를 아신 거예요.
제가 처음에 설명했습니다.
참깨를 으깨고 여러 과정을 겪어서 나온 참기름이 수많은 사람의 자기 생명을 바치는 희생이 담겨있는 음식이라고 하는 걸 아신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떡과 포도주, 밥상 위에 올라온 그 음식과 자신을 같이 여기며, “내가 곧 생명이다”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먹는 건지 아니면, 먹기 위해서 사는 건지, 이건 구별할 수가 없어요.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먹지 않으면 죽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떡과 포도주, 먹을 그것이 “나다”라고 얘기하셨어요.
먹어야 사는 우리에게 “내가 생명을 주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나 혼자서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한 겁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와 수많은 사람의 도와주는 그것으로 존재하게 된 것처럼,
내가 여기 밥상 위에 올라올 때까지 수많은 사람의 시간을 바치고 땀을 흘리는 것, 그 속에 담겨있는 생명을 우리가 먹게 되는 것처럼,
나의 생명도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눠 받으면서 살게 된다는 겁니다.
이걸 인정할 줄 알아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이 날 먹으라 하신 이 말씀은
내가 너희에게 나를 주듯, 너희도 다른 누구에겐가 너 자신을 주면서 살라.
이 길이 내가 너희에게 주는 십자가이며, 세상을 구원하는 길이니,
이렇게 살아보거라 말씀한 겁니다.
저는 이 말씀,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보면서,
백 세에 세상을 떠나시면서 어머니께서 제게 주신 말씀을 떠올립니다.
목사님의 아내로 평생을 사셨는데 “예수 잘 믿어라. 이것뿐이다.” 하셨어요.
지금도 그 말씀이 내 가슴속에서 요동쳐요.
어머니께서는 왜? 목사인 아들한테 세상 떠나시면서 “예수 잘 믿어라. 이것뿐이다.” 말씀을 주셨을까? 되새겨 볼 때에,
예수 믿는 것만이 생명이라 말씀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7.
예수님께서 “날 먹어”라고 하신 이 말씀을 다시 해석해 보면서
‘날 먹어’라는 이 말을 ‘사랑’이라고 정의해도 틀리지 않다고 봅니다.
사랑을 먹으면서 살라,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라.
‘희생’이라고 말해도 됩니다.
또는 being for others, 타자를 위한 존재, 내가 바로 타자를 위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마지막에 날 먹으라 하시는 말씀과 상통합니다.
또는 선한 이웃이라고 하는 ‘선린’(善隣), 사마리아 사람 얘기처럼, 선한 이웃이 내가 되어주는 것, 이렇게 불러도 괜찮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오늘 예배 후에 밥상을 맞이할 텐데, 밥상 앞에서 다시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식탁에 젓가락과 숟가락을 올리는 그 덕분에 내가 있고, 밥상 위까지 온 모든 것이 생명을 나눠준 것으로 말미암아 하루하루를 살 수 있기에,
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나 자신을 감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생명을 나누고 나누어 받아 살고 있는 우리가, 생명을 살리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제자의 도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배우려고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레갑교회 목사님은 그것을 몸으로 잘 보여 주시는 분이고요.
제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해 보지도 못하고, 하지도 못하는 일을 목사님은 행하고 있어서 참 존경스럽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를 먹고 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을 나누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기도
주님,
밥상을 대할 때마다,
생명 나누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하시고,
우리에게 자신의 시간과 헌신의 손길로 생명을 살리게 하는 모든 이들의 은혜도
감사하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예수를 먹은 사람으로. 예수를 닮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강석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