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고 싶은 설교

생활 속의 구원

경동교회 임영섭 목사 설교 원문에 실린 그림 또는 사진 1

최근 우리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느 때도 경험하지 못했던 많은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제가 친교와 소식 시간에 인사를 드리면서 인터넷으로 예배드리는 교우들에게 인사 말씀을 드렸는데요, 사실 생각해 보면 몇 년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고 또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여러분들도 내가 출석하는 교회뿐만이 아니라 유튜브나 케이블 TV 통해서 다른 교회의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또 폭넓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어떤 분들은 굳이 교회 나가지 않고 인터넷으로만 믿음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있고, 또 어떤 분들은 아예 교회라는 데를 나가지 않고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서 혼자 스스로 그렇게 신앙 생활하시는 분들도 점점 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교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 새로 등록하신 분들을 일일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요, 말씀을 들어보면 지금까지 인터넷으로 오랫동안 우리 교회 예배를 드리다가 이제 현장에서 또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등록하신 분들이 여럿 계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도 국내에서 해외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계시는,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익명의 경동교회 교인도 많이 계신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변화 속에서 저절로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어떻게 믿는 것이 바르게 믿는 것인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한 환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시는 구원은,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만, 이 교회 안에서만, 우리가 그 구원을 맛볼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나중에 천국에 가거나 아니면 이 땅에서 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 등록하고, 출석하고, 교회 공동체 내에서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을 이 시대에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서 6장이 이런 질문과 깊은 관계를 가진 말씀입니다. 내용을 보시면 예수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구원을 누린다.”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이 내용을 많이 들어본 것이지만, 이 요한복음 말씀 속에는 사실 당시 초대교회가 안고 있던 심각한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그 고민은 앞서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반드시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우리는 회당에 가서 반드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반드시 교회 공동체에 속해야 하는가? 이런 고민이 이 요한복음서 말씀의 역사적인 배경입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고민과 물음, 여기에서 이 요한복음서는 출발합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서 기록한 초대교회 공동체 그리스도인들은 회당에서도 신앙생활을 했는데, 이들이 회당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 읽어보면 이러한 회당과의 갈등, 회당에서 쫓겨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말씀들이 여러 군데 등장합니다. 몇 군데 소개해 드리면, 9장 22절을 보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회당에서 내쫓기게 되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12장 42절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지도자 가운데서 예수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겼지만, 바리새파 사람들과의 갈등 때문에 마음대로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 못했다.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믿는다고 이야기하면, 유대교 회당에서 갈등이 생기고 쫓겨날 수 있어서 그냥 유대인으로서 회당에서만 신앙 생활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서 16장 2절에서도 회당에서 내쫓기는 말씀이 나오고, 이처럼 요한복음서 당시 회당, 성전이라고 하는 이 신앙의 체제에서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어떻게 이어갈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이 이 말씀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갈등과 고민에 대해서 우리에게 어떻게 이것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가르쳐주는데, 그 방법이 대단히 파격적입니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신앙,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구원과 은혜, 그것은 종교라는 체제와 교회라는 조직, 예배라는 형식도 중요하다. 하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은 교회 바깥에서도,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이 세상 속에서도 얼마든지 이어갈 수 있다, 우리는 그곳에서도 구원을 누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가진 신약 성경을 보시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복음서가 있지만이 요한복음서라고 하는 책은 다른 복음서와는 구별되는 매우 독특한 특징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이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신앙생활하고 예배를 드리면서, 말씀도 읽고, 기도도 하고, 찬송도 부르고, 또 같이 친교도 나누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느냐? 바로 성만찬 예식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드리고 있는 이 그리스도교 예배의 여러 가지 다양한 요소 중에서 그래도 이것만큼은 우리가 포기하지 못한다, 이것만큼은 반드시 붙잡아야 하고, 유지해야 한다고 하는 이게 뭐냐? 바로 성만찬입니다. 그 정도로 성만찬이 중요합니다.

마태복음서 26장을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마가복음서 14장에 나오고, 누가복음서 22장에 나오고, 나중에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에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성만찬 예식을 할 때 제정의 말씀으로 이 고린도전서 말씀을 제가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 내용이 뭐냐? 우리가 매달 성만찬 예식에서 고백하는,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해주셨던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은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나의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 를 기억하여라. 이 잔은 너희를 위해서 흘린 나의 언약의 보혈이다. 이것을 마셔라.” 바로 이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마태, 마가, 누가,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초대교회 예배와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던 이 성만찬에 대한 말씀이 요한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서 13장을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성만찬의 분위기를 얼핏 우리는 느낄 수 있고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13장에는 성만찬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오직 제자들의 발을 시켜주신 세족식에 관한 내용만 등장합니다. 다른 복음처럼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다. 언약의 피다.” 이런 말씀이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과 성만찬 예식을 나누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요한복음서 기자는 이것을 생략하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성만찬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우리가 반드시 교회 안으로 들어가서 예배와 성만찬을 드리지 않더라고 해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있기 때문에 요한복음서 기자는 이것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며, 예수의 생명이 나의 삶과 신앙에 흘러넘치게 하는 것, 그것이 예배와 성만찬 우리 신앙의 목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요한복음서 6장 말씀을 보면서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비록 최후의 만찬이 요한복음서 13장에 나오지 않지만, 오늘 요한복음서 6장에 나의 살과 피를 먹으라는 말씀도 결국은 성만찬에 관한 내용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서 6장을 보면 요한복음서 기자는 예수의 말씀을 기록하면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 고린도전서와는 전혀 다른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복음서는 빵을 먹으라고 하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 헬라어 ‘소마’라고 하는 ‘몸’이라고 하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보시면 요한복음서에는 ‘몸’이라는 말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헬라어의 ‘싸륵스’라고 하는 단어 ‘살’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너희는 나의 몸을 먹으라는 다른 복음서의 단어도 그냥 먹는다는 뜻의 ‘에스티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오늘 요한복음서 6장에서는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헬라어 ‘트로그’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씹어 먹다’라는 뜻입니다.

결국 요한복음서는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예수를 예배 시간에 종교적인 의례 안에서 기념하는 것도 좋지만, 그 신앙의 행동과 효과와 영향이 예배당 안에서만, 예배 형식 안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기자는 의도적으로 성만찬 예식에서 사용하는 단어들을 배제하면서 매우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용어를 씁니다. ‘몸’이 아니라 ‘살’이라는 말을 쓰고 있고,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씹어 먹는다’라는 일상적인 단어를 씀으로써, 우리가 예수 믿는 모든 행동이 교회 안에서 바깥으로 나가야 하고, 예배 안에서 우리의 일상생활로 옮겨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서 본문 바로 다음에 나오는 59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는 이 6장 말씀을 어디에서 가르쳐 주고 계시느냐? 바로 요한 공동체가 갈등을 겪었던 회당에서 이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요한 공동체처럼 비록 회당에서, 성전에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너희는 크게 실망하지 말라,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혹시 교회에 나오지 못하더라도, 함께 성만찬에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슬퍼하지 말아라. 우리의 믿음은 교회 바깥에서도 생명력이 얼마든지 더 넘칠 수 있고, 성전이나 회당이나 교회 같은 건물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더 큰 은혜를 체험하고 구원을 이룰 수 있다. 예수는 이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우리가 지금 드리 고 있는 이 예배가, 우리가 지금 모여 있는 이 예배당이, 우리 신앙의 목적이나 우리 신앙생활의 주요 무대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나오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은 예배드리기 위해서만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삶 속에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예수를 믿든지,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서, 예수처럼 살기 위해서, 우리는 이렇게 모이고,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이렇게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와 예배를 마치 핸드폰을 전기에 충전하는 것, 바로 거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들고 있는 핸드폰, 사용하는 핸드폰의 목적은 충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드리는 이 예배를 마치 주유소에서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역시 우리가 자동차를 타는 목적도 주유소에 가서 기름 넣기 위해서 우리가 자동차를 사고 타고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충전하고 기름을 넣었으면 당연히 세상 속에 나아가 그 원래의 용도와 목적대로 사용되어야 하고,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서 나누는 사랑,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생활의 모습도 바로 비슷한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당에 오기 위해서 한 주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이 자리에 모입니다. 우리는 예배드리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예수처럼 살기 위해서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의 진정한 신앙과 예배는 바로 예배당을 떠나는 그 시간에 우리의 신앙생활의 본론에 들어가는 것이고, 메인 이벤트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구원과 은혜도 바로 일상생활 속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회화 작품 가운데 하나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일 겁니다. 이것이 밀라노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아 성당에 그려져 있습니다. 오늘 말씀드린 공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마지막 만찬을 소재로 그린 작품인데, 이 그림에 대해서는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다른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는 그 그림의 내용도 훌륭하고 좋지만 그림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교훈은 이것이 어디에 그려져 있느냐? 이 최후 만찬이 그려져 있는 장소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작품은 예수와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 장면을 묘사하고 있어서, 우리가 드리는 그리스도교 예배와 성만찬 예식과 대단히 깊은 관련을 가진, 우리에게 감동과 상상력을 주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디에 있느냐? 성만찬 예식 예배를 드리는 예배당이아니라,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밥을 먹는 식당에 이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뿐만이 아니라 다른 화가들이 그린 최후의 만찬 그림들도 수도원의 식당에 이 그림이 걸려 있는 경우들이 자주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예배가 가진 핵심적인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최후의 만찬,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와 우리의 믿음, 이것은 단순히 종교의식이나 형식적인 신앙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품고 있습니다. 그들이 먹고 있는 그 밥을 통해서 힘과 지혜를 얻어서 세상에 사랑과 복음을 전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나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밖에 나가 이루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것이 바로 당신들이 꿈꾸는 하나님 나라 신앙과 예배 목적이 아니겠냐고, 그런 이유로 식당에 그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수도원 식당에 걸려 있는 최후의 만찬 작품들은 오늘 회당에서 예수께서 선포하신 요한복음서 6장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무거운 사명과 역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밥을 먹었으면, 예수를 믿었으면, 예배를 드렸으면, 밥값을 하고, 믿음 값을 하고, 예배 값을 하라는 의미가 오늘 요한복음서 말씀과 식당에 걸려 있는 최후의 만찬 작품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령 강림의 13번째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예배가 교회 바깥에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구원을 이루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떡과 포도주, 주님의 살과 피가 우리의 힘과 지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이 예배당 문을 나설 때 성령께서 그 발걸음 위에 함께해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살도록 힘과 능력으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 십자가 사랑을 통해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가 항상 주님의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저희의 믿음, 소망, 사랑이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시고 이 세상 속에서 성령의 역사와 함께 하나님 나라 이루어가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임영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