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신앙의 시작은 귀담아듣기
- 등록일
- 2024년 6월 14일
- 설교일
- 2024년 6월 9일
저는 소개한 것만큼 큰 목사 아니고, 은퇴하고 올레길을 걷고 있는 목사입니다.
어제는 비가 왔지만, 18코스 검은 모래 해수욕장(삼양)까지 비를 맞으며 걸었습니다.
여행 중이어서 설교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준비하지?
무엇을 말씀드려야 하지?
주보를 보니, 주영광교회가 52년이 되었는데 교회 상황을 조금도 알지 못하고, 기도할 뿐이었어요.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무엇일까? 귀를 열고 기다렸습니다. 주님은 제게,“네가 지금 올레길을 걷고 있지 않느냐? 올레길 걸으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전하면 될 거다.” 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제가 깨달은 것을 나누는 것이 더 정직한 설교가 되리라 여기면서 준비했습니다.
2.
올레길이 437km랍니다.
해변을 중심으로 해서 마을과 마을을 잇는, 제주어로 ‘좁은 골목’을 따라 만든 골목길, 산길, 들길을 한 바퀴 돌면, 437km가 된답니다.
올레길 걷기 준비하면서 예수께서 공생애 3년 동안 몇 Km을 걸으셨는지 찾아보았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이 기록되었는데, 유대와 갈릴리, 사마리아, 예루살렘과 여러 도시, 마을 이름이 나옵니다. 주로 두 발로 걷기였겠죠. 특별히 나귀를 탄 기록은 예루살렘 입성 때였습니다. 총 5,000km라고 합니다.
지구 둘레는 40,075km고, 세계 일주를 위해서는 약 80,000km를 걸어야 한답니다.
3.
여러분은 올레길을 걷는 사람을 많이 만나 보았을 겁니다.
제주도 목회를 시작한 임 목사님께 종주 했느냐 물으니, 11년 차라고 들었는데 “씨익” 웃더군요. 종주(縱走)하지 못했다는 미소이죠. 걷는 것이 쉽지 않은데, 왜 올레길을 걸을까요?
걸어보니, 참 좋습니다.
체중도 빠져 몸이 날씬해지고, 건강해집니다.
숨쉬기도 턱밑에서 숨 가쁘게 쉬던 것이 복식호흡이 됩니다.
제주도는 공기가 맑고, 물이 좋습니다. 화산으로 오염물질을 제거한 물을 지하수로 담수하여 제공하기에, 최고의 물입니다. 아무리 전날 피곤하게 잠들어도 아침에는 완전히 회복하여 일어나게 합니다. 제주도가 이런 곳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경험하는 자연적인 환경입니다.
이런 제주도 올레길을 걷는 목적을 물으면, ‘건강 회복을 위해서’라는 분이 제일 많습니다.
암을 기적적으로 고쳤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정신적인 피로를 풀기 위하여 걷고, 걸어 회복하려고 걷기도 합니다.
437km를 완주(完走)했다는 성취의 쾌감을 위하기도 합니다.
이런 분은 하루에 두 코스를 걷기도 합니다.
걷기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목적을 품고 도전합니다.
저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기도 제목을 가지고, 걸으며 기도하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목회 50여 년에 대한 정리와 반성이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처음에는 둘 다 잘 안되었습니다.
걷기 자체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평탄한 길이라고 하더라도, 제 나이가 적은 나이가 아닙니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올라 헉헉거리는 몸이었습니다.
서귀포 쪽 해변은 돌멩이 길이어서 정말 비틀거리며 걸었고, 계단도 많고, 얕은 오름도 몸이 생각을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너무 힘드니 기도고, 반성이고, 뒤돌아보는 정리란 머리에 떠올려지지도 않았죠. 힘들어, 죽을 것 같아, 왜 끝이 보이지 않아, 중얼거리며 겨우겨우 견디며 걸었습니다.
그래도 몇 날 고생스럽게 걷으면서, 공기 좋고, 물 좋은 덕분에 꿀잠만 자고 나면 회복되어, 조금씩 처음 목적을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걸으면서, 기도 제목을 제게 맡긴 분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했습니다.
목회했던 교회와 교인을 회상하면서 반성도 할 수 있었습니다.
3.
저는 한 사람 한 사람 그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면서, 제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으면서 기도하며 걸었습니다.
목회했던 교회와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은 잊힌 분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남아있는 분들을 위하여 평안과 강건하길 기도하며 걸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화들짝, 놀랐습니다.
여러분, 기도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떤 고난이 생겼을 때, 어떤 고통이 있을 때, 원하지 않는 시련이나 질병이 생겼을 때,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졌을 때, “하나님, 저는 나름 정직하게 살아왔습니다. 충성된 청지기로 믿음을 잘 지켰습니다. 그런데 암이라니요? 치유의 하나님 도와주셔요, 고쳐주셔요, 문제를 해결해 주셔요, 기적을 베풀어 주셔요. 하나님!”
이라고 기도합니다. “아무개 성도가 일 없이 고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그가 일용할 양식 때문에 고통받지 않게 해 주셔요.” 등등 청원의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내 뜻을, 간절히’ 아룁니다. 목사인 저도 이렇게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목사의 뜻대로 응답해 주실 것을 믿으며 기도했습니다. 어쩌면 강청(强請)한 것입니다.
이것이 올레길을 걸으며 가졌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기도 중에 화들짝 놀라게 되었을까요?
제게 들려진 음성이 있었습니다.
“목사야, 너는 왜 내 말은 듣지 않니?”
“너는 왜 내 뜻을 묻지 않니?”
“넌 내 생각을 왜 헤아리지 않니?”
“좀 들어라.”
“먼저, 들어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걷고 있는 목사를 향하여, “좀 들어라. 귀(耳)를 열고, 귀(耳)담아들어라.”
말씀하는 소리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왔습니다.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 많이 하는 분들의 기도, 옆에서 살펴보면, 기도를 정말 열심히 하는데, 기도를 마치고 그냥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는 분들이 많습니다. 다음에도 똑같은 기도를 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떠납니다.
어떤 기자가 테레사 수녀에게 질문했지요.
“수녀 님은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한참 침묵하던 테레사 수녀는 기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듣지요.” 했답니다.
저는 화들짝 놀랄 소리를 들으면서 테레사 수녀의 대답을 떠올렸습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기도한다”라고 할 때, 우리의 기도가 어떤 기도였습니까?
하나님의 대답하시는 음성을 들으려고 하는 기도였는지. 떼쓰듯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뿐이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4.
“먼저, 들어라.”
이 소리는, 제게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기도 제목을 잔뜩 안고 왔던 목사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려고만 했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 인지 듣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헤아리려고 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목사의 기도를 당연히 들으실 것이라는, 목사의 교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태도가 기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목사 자신의 50여 년의 목회를 정리하고 반성하는 데에도 적용됨을 알았습니다.
여기에서 성경 말씀을 생각합니다.
창세기 1:1-5의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 첫째 날에 있었던 일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시면서 “빛이 있으라” 하여 빛을 만들고,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었습니다.
둘째 날에도 말씀하시니,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말씀하시는 그대로, 무언가가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섯째 날에는 하나님 자신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남녀로 만들고, “생육하고 번창하여라. 이 세상을 잘 다스려라.” 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의 내용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어요. 하나님께서 시작이라는 고백이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혼돈(混沌), 공허(空虛), 흑암(黑暗)이 깊음 위에 있다고 했는데, 어떤 상태를 표현한 것일까요? 아무것도 없는 것(無)을 말합니다. 그것을 카오스(chaos)라 합니다. 이것이 어떤 것인지 저도 잘 모릅니다.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한다면, 모든 것이 뒤엉켜 뒤죽박죽, 무질서, 엉망진창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그랬더니, 빛이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 날에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여섯째 날까지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천지가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일어서세요.” “앉으세요.”
여러분은 제 말, “일어서라”는 말을 들었기에 일어섰습니다.
“앉으라”는 말을 귀로 들었기에, 앉았습니다.
귀(耳)가 있어 들었습니다.
이소희 시인이 창세기 1장의 내용으로 ‘빛의 귀’라는 시를 썼는데. “만물에 귀(耳)가 있었다.”
라 했습니다.
혼돈, 카오스 상태 안에서 빛이, 빛의 귀를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만물에 귀가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순종하여 자연 질서를 이루고,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었습니다. 먹이사슬이 조화를 이루어 서로를 살려주는 상생(相生)과 공존(共存)의 세상을 이루었습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우리가 이곳을 에덴동산이라 부릅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평화로워서, 우리는 이곳에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이상적인 세상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만물이 귀를 열어 귀담아듣고 순종하여 창조되었습 니다.
- 마지막 날에는 사람을 만드시고, “잘 다스려라.” 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에 따르면, “그래도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먹지 말아라.” 하십니다. 사람은 먹지 않았어야 합니다.
먹지 않는 것이 올바른 것입니다.
“하지 말라”를 귀담아들었으면, 먹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질서가 무너져 무질서가 되고, 평화가 깨지고, 공존의 세상이 파괴되고, 서로 살리던 상생(相生)의 세상이 혼자만 살려고 서로 죽이는 죽임의 문명이 이 땅에 가득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귀(耳)가 귀담아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하는 소리, 달콤한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질서, 평화, 상생, 공존의 세상이 되는데, 엉뚱한 존재의 말을 듣는 바람에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비참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탄의 말 중,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당연하죠.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질서가 조화롭고, 평화롭고, 서로를 돕고, 함께 나누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가 아닌 세상인 것 같습니다.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신앙이 무엇으로 시작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신앙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성경이 이것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잊지 마셔요.
신앙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기입니다.
6.
저는 목사로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설교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성도들이 잘 듣게 하는 역할을 하는 목사입니다.
저는 저의 50여 년 가까운 목회를 반성하면서, 올레길을 걷고, 걷고, 또 걷고, 내일도 반성하면서 걸을 겁니다.
걸으면서,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목사인가 반성하였는데, 잘 듣고 전하는 목사였다면 좋은 목사, 올바른 목사라고 할 수 있겠는데, 되돌아 자신을 살펴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보다는 나의 생각, 나의 뜻을 더 많이 설교했다는 어리석음을 깨달았습니다. 왜 이런 판단을 하게 되었느냐 하면, 저는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세상이 악하다고, 무질서하고 죄가 가득하다고 비판은 하면서도, 정작 악한 세상을 선하게 바꾸지 못했습니다.
평화가 깨진 세상에 대해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으로 살았는가? 교인들이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말씀을 올바르게 전했는가? 생각해 보니, 그렇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죄악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알면서도 죄악을 없애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교회도 큰 교회를 목회했는데, 큰 교회만큼 잘못된 것도 많은데, 그것을 바르게 바꾸지 못했습니다. 병든 믿음을 가진 것, 그대로입니다.
교인들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잘못된 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보면서도 올바른 신앙으로, 예수님의 제자 됨을 살아가도록 돕는 일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였습니다.
무엇이 제게 문제였을까? 귀를 열고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잘 듣고, 제대로 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올레길을 걸으면서 부끄러운 마음이 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귀를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었다면, 제 말에 힘과 능력이 없을 리 없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꾸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고, 세상을 창조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 설교와 가르침이 능력과 힘이 없었다는 것이, 제가 전한 것이 하나님의 생각과 뜻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증거라는 깨달음입니다.
이제라도 신앙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열고 귀담아듣는 것임을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7.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의 아픔, 고통, 고난, 질병, 실패, 그리고 그의 기쁨, 성취, 성공에 하나님 자신의 뜻과 생각과 계획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자기가 성공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이라고 여기는 경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패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고, 생각과 계획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과 생각과 계획은 묻지도 않고, 목사의 판단으로 성공만을 기원하며 바랬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사에게 “목사인 네가 무엇을 안다고, 고난과 실패를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판단하느냐? 네가 뭔데 네가 좋다는 것으로 바꿔 달라고 떼쓰냐? 네가 좋다고 하는 것이 그에게는 독이 될 수 있음을 왜 모르느냐? 난 그를 위하여, 그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고 있는 것을 네가 믿지 못하고 의심하느냐?” 질책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게 올레길을 통해서 “고난 중에 있는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옳지만, 그의 고난은 그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내가 준 것이야. 네가 깨달아라.” 하셨습니다.
저는 이 음성을 들으며, 올레길 위에서 부끄러움을 경험했음을 고백합니다.
8.
아담과 하와 이후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귀(耳)빠진 날을 생일로 지킵니다. 왜 입(口) 빠진 날이 아니고, 귀빠진 날이라 할까요?
귀(耳)가 어머니에게서 나와야 비로소 사람이 될 수 있고, 몸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듣는 귀가 말하는 입보다 앞선 이유, 여기에서 듣기가 신앙의 시작임을 알려줍니다.
귀를 귀(貴)하게 여기며 활짝 열고 살아야 한다는 뜻인데우리가 자꾸만 자기 말만 하려고 하면, 귀가 막히게 되죠.
귀가 막히면, 기(氣) 역시 막힙니다.
기(氣)가 막히면, 영(靈) 역시 막히게 됩니다. 영적 능력이 막힙니다.
하나님과 불통(不通)이 되면, 막힌 것이 병들게 되며, 생명의 기운이 막히고, 사망 곧 죽음이 옵니다.
그래서 우리의 귀가 막히면 안 됩니다.
성경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노아야, 방주를 만들어라.”
하나님의 엉뚱한 말씀이었지만, 노아는 곧이곧대로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아, 떠나라.”
‘떠남’이 고생을 자초하는 일이요, 보호와 도움을 받지 못하는 떠돌이가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말씀에 따라 떠났습니다.
“모세야, 네 발의 신을 벗어라. 내 백성을 구원하여라.”
힘겨운 사명이었지만, 그대로 했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예 어린 제가 여기 있습니다.” 엎드렸습니다.
예언자들이 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들은 모두 귀를 활짝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敬聽)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사도 바울도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는 주님의 부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며,“나는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피하고 싶지만,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셨죠. 예수님의 귀가 열려 있었고 하나님의 뜻을 들었음을 나타냅니다.
가정의 평안도, 부부 사이에 귀가 닫히고 목소리만 커지면 다툼이 일어나 깨지게 됩니다.
자녀와 부모 사이에 신뢰, 배려, 존경, 이것이 ‘말하기’보다 ‘듣기’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주영광교회 교인들이 목사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교회에 참 평안이 가득하게 될 것이며,목사님은 교인의 말하는 것을 잘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은혜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신앙의 시작이 무엇으로 시작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는 것에서부터 신앙의 시작이요, 복된 길의 첫걸음인 것을 말씀드리면서, 귀(耳), 활짝 엽시다!
(강석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