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아름답도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여!
- 등록일
- 2024년 5월 16일
- 설교일
- 2024년 5월 12일
한 달 전, 4월 7일 주일예배 참석했던 목사를 설교하게 하시어 고맙습니다.
오늘 대다수의 한국교회는 어버이 주일로 지키는데, 방화동중앙교회는 가족초청 전도주일로도 지키는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 봤습니다. 전도가,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듯, 그만큼 절박하고 중요한 교회의 현안이라 여기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 설교는 목적이 분명합니다. 강석찬 목사의 전도 비법을 전수(傳授)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전수(傳受)하여, 그대로 실천하면, “수년 내 주의 교회를 부흥케 하소서. 빈자리를 채우자. 내 집을 채우라”라는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 로마서 10:13, 사도 바울의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믿으시죠?
한 번, “주님”이라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봅시다.
이 말씀에 따라 우리가 “주님”하고 예수님을 부르면,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말씀일까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며 믿을 때, 구원받는다는 뜻입니다. “주님, 주님, 예수님” 부른다고 구원받는다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할 때, 구원이 은혜요 축복으로 허락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로마서 10:9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신 것을 믿습니까?
“아멘!” 여기까지는 교인이라면 누구나 인정합니다. 저는 여러분은 모두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였음을 믿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았다’는 것이 무엇이며, 얼마나 큰 축복이요 은혜인지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구원은, 죄인인 우리의 죄의 값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대신 치르고 용서받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설 때, 의롭다 인정받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구주이며,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신 것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안다. 내가 너의 의로움을 인정한다. 네가 나의 나라를 상속받아라. 나의 영원을 네가 누려라.” 하십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은 없습니다.
우리의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할까요?
없습니다.
생명, 이보다 더 귀한 것이 이 세상에 있을까요?
없습니다.
재물, 권세, 이름을 얻는 명예,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그 어떤 것도, 생명보다 귀하지 않습니다. 천하를 얻는다고 해도 생명보다 중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았다’는, 영원한 생명을 허락받은 것이므로, 가장 귀한 것,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있을 수 없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 방화동중앙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로 가득 채워져 있으니, 하나님의 축복이 충만한 줄 알기를 바랍니다. 3. 바울의 말씀을 더 살펴봅니다.
사도 바울은 10:11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이를 언급합니다.
“듣지 못한 이가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
“전파하는 자가 없는데 어찌 듣겠느냐?”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좋다는 것을 듣지 못한다면, 믿을 수 없고,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도, 좋다는 것을 전하는 자가 없다면, 좋은 것을 가질 수 없다고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왜 이런 말씀을 한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복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까?
그냥 어쩌다 보니, 어느 날 눈떠보니 교인이 되었나요?
누가 여러분을 이 자리, 복된 자리에 있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것일까요?
조금 더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했습니까?
어떤 분은 부모님을 통해, 당연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은 친구를 통해 전도 받아 교인이 되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스스로 고난과 시련 속에서 체험적으로 신앙의 문을 열고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저절로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우여곡절이 소설을 쓰고도 남을 것이 신앙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이 과정에서 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또한 교회가 나팔을 불며 복음을 외쳤기에, 여러분이 듣고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이 큰 은혜와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하는 자가 없는데, 누가 듣겠느냐는 물음을 던진 것은,누가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누가?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할까요?
“우리!”
그렇습니다. 우리 속에는 내가 들어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입니다,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 주십시요!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성도가, 목사, 장로, 성가대 지휘자, 한 사람 빠짐없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전한 것입니다.
구원받았으면, 구원의 복음을 나누라는 요구이죠.
- 설교 제목을 무엇이라 했습니까?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이여!”
이것은 10:15의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를 조금 바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사야 52:7의 예언을 인용했습니다.
사람이 마음에 들면 그의 모든 것이 다 예뻐 보이게 됩니다.
코, 눈, 손, 목소리, 다 예쁘게 보이죠.
납작한 뒤통수도, 남들 보기엔 별로라도, 멋있게 보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죠.
사도 바울이 “아름답도다! 복음(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여!” 한 문장이, 이런 마음을 담은 감탄문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사야 52:7의 감탄문으로 기록된 예언이 아주 특별한 표현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의 기록은 거의 다 서술형입니다.
어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사건을 담담하게 전하는 서술형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기록인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의 천지창조,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그냥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뿐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후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 했을 뿐입니다. 이 기록을 남기면서 감탄사를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느낌표를 10개씩 사용하면서 “참, 좋았더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객관적으로, 서술형으로 기록했을 뿐입니다. 감동해서 감격을 나타낸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홍해를 마른 땅을 걷듯 건넜습니다. 한 마디로 놀랍고도 놀라운 이적입니다. 건넌 후, 미리암과 여인들이 소고치며 노래하고 춤추긴 했지만, 이 기록 역시 서술형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내밀자 동풍이 불어와 바다 한 가운데 길을 만들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고 뒤 쫓아온 애굽 군대는 수장되었습니다. 그냥 문장으로 보면 덤덤합니다.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 성을 무너지게 했을 때도 서술형으로 역사 기록하였습니다. 감탄사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2 이사야의 예언이라 알려진 이사야 52장 7절의 기록은, 감탄문입니다.
남 유다왕국이 바벨론에게 패망하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70년의 포로 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지치고, 절망했고, 실의(失意)하며 희망을 잃었습니다. 이들에게 이사야가 예언했습니다. 포로 생활은 끝이 날 것이며, 예루살렘에 돌아가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에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라 했습니다. 예언을 전하는 사람의 발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감탄사로 표현하였습니다.
저는 중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영어를 배웠습니다. 그때 감탄사를 배웠는데, 감탄사는 최고의 찬사라는 배움이었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를 “How beautiful you are!”
이사야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의 발’에 최고의 찬사를 보낸 것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사야 52:7을 “How wonderful it is to see a messenger coming across the mountains, bringing good news the news of peace!”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라 하였습니다.
예언하는 그 사람이 얼마나 예뻤으면 ‘발’이 아름답다고 했을까요! 이 발! 마라톤의 기원이 된 전투에서 40Km를 달려와 승리 소식을 전하고 숨진 병사의 발이요,신약성경 마가복음 1:15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신 ‘복음’(福音)의 헬라어 유앙겔리온(εύαγγελίον)을 시장광장에서 외치는 사람, 기쁜 소식 선포자의 발입니다.
최고의 찬사를 이사야가 예언으로 기록했고, 바울이 인용한 것입니다.
감탄문으로 기록한 것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그 사람이 귀하고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아름답고 감사하고 영광스럽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강조한 것입니다. 성경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저는 여러분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이런 찬사를 듣는 한 사람이길 바랍니다.
- 두 번째 본문,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 받으라. 이 그리스도 예수는 낮아지신 그리스도이다”라고 고백하면서,“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빌 4:9)라 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하기 전에 고린도전서 9:16에서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禍)가 있을 것이로다.”
무슨 뜻일까요?
복음(福音)이 화(禍)가 될 수 있다는 것인데, 무슨 말일까요? 어떤 의미일까요? 여러분은 복음을 믿어 하나님의 축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총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허락받아 누리고 있는 축복과 은혜, 이것이 화가 될 수 있고, 우리에게 잘못된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물로 설명해 봅니다.
물은 흐르는 물이어야 살아있는 물입니다.
물이 좋은 것에는 분명한데, 아무리 좋은 물이라고 하더라도 흐르지 않고 고여 있기만 하면, 언젠가는 부패하여 썩은 물이 됩니다. 생명을 살리는 물이 아니라, 생물을 죽이는 죽음의 물로 변합니다.
바다, 지구라는 그릇에 담겨 있는 물입니다.
바다가 살아있는 물인 것은, 끊임없이 파도치며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학자가 파도가 1분 동안 몇 번 치는지 조사했더니, 15에서 20여 번이랍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사람의 숨쉬기와 같은 파도 치기라는 것이죠. 숨을 들이마시고 내쉼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되듯이, 바다도 파도의 들이치고는 물러나는 움직임으로 살아있는 바다가 된답니다. 지구도 사람과 호흡을 같이 하는 생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의 원리입니다.
복음(福音)도 물과 같습니다.
복음이 채워져 있는 채로 가만있으면, 복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 교회에 해(害)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한 축복도 흐르지 않으면 독(毒)이 될 수 있습니다.
채워진 복음, 축복이 해가 되거나 독이 되지 않게 하도록, 내보내어 흐르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傳道)입니다.
하나님의 축복도 흘러야 생명의 기운을 나누게 됩니다.
저는 방화동중앙교회에 하나님의 축복이 충만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믿어 구원받아 천하보다 귀한 영원한 생명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흐르지 않고 여러분 안에 멈추어 고여있으면, 축복이 화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세상을 향해 열리질 않고 교회의 문이 닫혀 있다면, 이 교회는 복음을 생명의 흐름으로 가꾸지 못한 것으로, 자꾸 쇠약해지고 병들게 됩니다.
무서운 진단일 수 있겠지만, 우리가 은혜로 받은 복음을 내 안에 가지고만 있으면, 받은 축복을 혼자 누리며 즐기는 것으로 욕심의 유혹에 빠진 것이죠. 하나님께서 가만 둘리 없습니다. 물론 욕심을 부리게 한 것이 사탄이기 때문에, 사탄의 꼬임에 넘어간 것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9:16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라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이 복음 되게 해야지, 복음이 내게 화가 되어서야 될 일입니까?
교회에 울타리를 쳐놓고, 울타리 안에서 ‘우리끼리 즐겁게 지내자’ 자화자찬하는 동안 실망한 영혼들이 슬그머니 교회를 빠져나갑니다. ‘가나안’ 교인이 됩니다.
이렇게 되도록 나누지 않고 우리끼리만 챙기면서 살면, 새로운 성도를 오히려 교회 밖으로 쫓아내는 교회가 된다면, 주님께서 기뻐하는 교회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믿기 시작한 우리가 변해야 합니다. 6.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의 신앙을 받아들일 때, 누구를 볼까요?
우리의 속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겉으로 드러난 사람을 먼저 만나고 봅니다.
우리의 속 사람의 믿음을 보기 전에 겉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기 시작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은혜와 축복이문을 열고 믿으려 하는 그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을 전하는 발이 되어야 하니, 내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또 알아야 복음을 전할 수 있으니, 성경을 공부하고 읽고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을 본 보여야 하니, 주일성수, 헌금 생활, 이웃을 사랑하며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봅시다.
보여 줍시다.
진심으로 복음이 자신에게 담겨 있다고 믿는다면, 복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자신의 옛사람을 벗어버리게 하고 그리스도의 새사람을 입게 하여, 새사람의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빌립보서 4:9 바울의 말씀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에 담긴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하십니다. 우리도 이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구원받으셔요” 하면, “너나 잘 믿어” 소리를 듣는다면 곤란하겠죠?
- 저는 금호동 언덕에 있는 성호교회를 목회한 적이 있습니다.
금호동은 6.25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가난한 지역이었습니다.
이 교회에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맏사위 신영희 장로님이 시무장로였습니다.
제가 성호교회에 부임하니, 세상을 떠나신 신영희 장로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신영희 장로님은 ‘신 예수’로 불리던 의사였습니다. 얼마든지 큰 병원에서 일할 수 있었지만, 금호동 가난한 지역의 사람들에서 나누고 베푸는 의사로 존경받았습니다. 환자들이 돈이 없으면, 그냥 보내주면서 나중에 돈이 생겨 여유가 있으면 갚으라 했습니다.
이렇게 살아봅시다.
성함을 들 수는 없지만, 후배 목사님이 지방의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당 옆에 그 지역에서 가장 큰 시장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시장에서 장사하는 분들에게 전도하려고 방문하며 듣기 어려운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러 점포의 소유주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자린고비에다가 장사가 잘 안되는 것 알면서도 세를 올리고, 꼬박꼬박 받아 챙겼습니다. 청소하지 않으면서, 뒷짐 지고 다니면서 소유주의 권세를 부렸습니다. 이분이 시장 옆 교회의 선임 장로였습니다. 교회에서는 존경받아 장로가 되었는데, 삶의 터전에서는 평판이 아주 나빴습니다. 시장 안 작은 가게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은 모두 장로에게 흰 눈을 보였습니다. 젊은 목사는 한 달을 기도하고, 장로님을 따로 만났습니다. “장로님, 장로님이 복음 전도에 걸림돌인 것을 아십니까?” “내가 이렇게 교회를 잘 섬기고 있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로님! 교회에서는 천사이신데, 왜 교회 문밖에만 나서면 마귀 노릇하십니까?” 젊은 목사가 나이 든 장로님에게 꾸중하듯 말하니, 장로님은 놀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목사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장 상인들에게 전도하려 했더니, 이구동성으로 장로님 욕하는데, 장로님 회개하셔요. 변해야 합니다.” 장로님은 훌륭했습니다. 젊은 담임목사의 말을 들었습니다. 정말 다음 날부터 시장 안에 서쪽에서 해가 뜨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새벽기도 마치고, 시장바닥을 쓸기 시작했고, 월세를 내지 못하면 감해 주었고, 사람이 너그러워 졌습니다. 변화된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시장의 상인들이 의아해 하다가, “와! 저 장로가 변했네?” 하더니, “장로님”으로 호칭이 바뀌고, 시장 옆 교회에 등록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는 놀랍게 성장하였습니다. 제 이야기는 큰 교회가 되었다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님 한 분이 변했더니,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장로님의 후광이 되어주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변화되면서, 여러분의 후광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빛이 비치도록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될 때, 전도하기를 마음먹은 그 사람이 슬금슬금 마음이 열리고, 영이 열리며, “교회 가자” 할 때, 끌려오는 것입니다. 변화된 여러분 때문이 아니라, 우리 뒤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때문입니다.
여러분 뒤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후광이 있습니다.
-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전도해야 할까요?
누가복음 15:4를 보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를 잃으면, 잃은 것을 찾아다닐 것인데 어떻게 했는지 예수께서 알려주십니다.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라 하셨습니다.
목자는 잃었다 찾은 양을 목에 걸고 돌아와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찾을 때까지’가 강석찬 목사의 전도 비법이기도 합니다.
“언제까지?”
“찾을 때까지!”
한 사람을 전도하기로 정했으면, 그 사람의 마음과 영이 열려 믿음이 생길 때까지, 그분이 교회에 믿음의 뿌리를 내릴 때까지, 가다가 중지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그분은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을 누리는 복을 받게 되고,교회는 빈자리가 채워지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얻은 열매로 보람이 채워질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러분은 사랑을 나누게 되는데, 사랑 나누기로 행복을 누리게 되는 덤이 있습니다. 교회는 한 사람의 믿음이 뿌리내려 정착하기 위하여, 교회 안에 널려 있는 돌이나 가시덤불을 제거하고 굳은 땅을 갈아엎어 옥토를 만들어야 하는데, 옥토로 변한 교회의 밭에 30, 60, 100배의 결실을 얻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때까지’를 다른 말로 바꾸면, ‘열 번 찍어 넘어지지 않는 나무 없다’라고 할 텐데,나무는 찍어 넘어뜨린다고 하겠지만, 사람은 찍어 넘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열릴 때까 지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제가 전한 비법이라는 것,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들은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점은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 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어도 행함이 없으면, 부뚜막 위에 소금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었던 강석찬 목사의 전도 비법을 행하여, 내년 이맘때쯤 두 배, 세 배의 성도들이 모여 받은 은혜, 축복을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가슴에 카네이션을 받아 달면서, 자녀들에게 효(孝)를 받는 주일로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버이 주일은 “내가 어떤 어버이가 되어야 할까?”
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생명 구원보다 더 귀한 것이 이 세상에 없음을 보여 주는 어버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가정이 복음으로 변화되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가정이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어버이의 역할이며, 행복이요, 보람입니다.
아무쪼록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이 어찌 아름다운지요!”
를 실천하는 복 있는 오늘이 되길 기원합니다.
강석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