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복 있는 사람, 행복한 교회

부활주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죽임의 세력을 이기신 부활의 은총이 열린 교회와 모든 성도에게 가득 채워지길 축원합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하면서 ‘빚을 갚는 심정’이었습니다. 여규식 목사님께서 오래전에 어머니께 ‘한글’을 가르쳐 주었다는 나의 조부 강병주 목사님에 관한 글을 주셨는데, 100년 전의 목회하신 할아버지를 쓴다는 것이 쉽지 않아 미루다가 3월 8일에야 탈고하였습니다. 그 사이 목사님이 2020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전에 책을 내지 못해 빚을 졌다고 여겼는데, 마침 아들 여신현 목사님이 교회의 귀한 예배에 설교하라 하시어, 오늘 저는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오늘 저는 설교 제목을 “복 있는 사람, 행복한 교회”라 했는데, “복 있는 사람이 있는 교회가 행복한 교회이다”라는 설교의 주제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은 설교를 들으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복 있는 사람이 되면, 열린 교회가 행복한 교회가 된다는 것을 알고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말씀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여기어 내용을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복, 행복’, 이 두 단어는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좋아하시죠?

새해가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복을 기원하시죠? 저는 “복 받을 일 많이 하셔요”라 합니다. 또 “오늘 하루 행복한 날이 되길 기도해요”라고 행복을 빌어주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시편 1편의 말씀과, 마태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 비유’ 말씀을 통하여, 성경은 어떤 사람을 ‘복 있다’ 하는지, 어떤 교회를 ‘행복하다’ 하는지를 말씀드리면서, 40년 된 열린 교회가 복 있는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행복한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미 행복한 교회가 되었다면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진 마셔요. 이미 행복한 교회인데 ‘더’ 받으면, 원래 ‘더’ 속에는 ‘독’(毒)이 같이 담기기에, ‘더’ 누리는 것을 열심히 나누는 행복을 맛보길 바랍니다.

  1.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을, 2절에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즐거워한다는 것은 말씀을 새기며 따른다는 것이죠.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주야로 묵상한다고 했으니, 하루 종일 성경만 읽어야 한다는 것일까요?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라 한 것입니다. 누가 이렇게 정의했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며 사는 사람이라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복 받았다”하는 돈이 많거나, 권력을 쥐거나, 유명해지거나, 소위 성공한 것을 “복 받았다. 복이 있다”라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한다는 것,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복이라 한 것입니다.

왜?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시편 1편은 6절에서, 복 있는 사람을 ‘의인’이라 부릅니다.

시편 1편 6절은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 합니다.

‘하나님의 인정’,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음’은 ‘구원받음’이요, 이것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영광을 누리는 자리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면 헛됩니다.

정말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인정, 예수님의 인정입니다.

“네가 의인인 것을 내가 안다” 이것이 ‘진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인정(認定)받음’, 이것은 구원과 연관되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한다는 말을 사도 바울은 ‘구원(救援)받음’이라 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가득 채워진 교회가 행복한 교회요,구원받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전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한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라고 인정받게 하여 구원받게 하는 일이, 생명을 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복의 근원입니다.

복의 근원인 하나님께서 “네가 의인이구나” 인정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1. 여러분, 스스로 자신을 판단해 보셔요.

하나님 앞에 지금 섰다고 상상하면서, 과연 나는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인정해 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지 않으시면, 걱정됩니다.

저는 목사로서 살아왔지만,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강석찬, 너 의인이구나”라고 인정받을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솔직히 부족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솔직히 그랬습니다.

그래서 정말 괴로웠습니다.

목회하는 동안만이 아니라, 은퇴한 이후에도 괴로웠습니다.

어느 날, 많은 설교를 했던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 비유의 말씀이, 제게 한 줄기 빛이 되었습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임금의 오른편에 구별하여 둔 자들에게 하신 말씀,“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아라.” (마태 25:34) 하시며, “I know you.” “내가 널 안다.” 하시는 주님의 인정 음성을 들었습니다. 양무리에 내가 속할 수 있다는 것이죠.

제가 평생 목회했지만, 뭐 잘한 것이 있습니까? 자랑하며 내놓을 만한 것이 없어요.

미워한 교인도 없진 않습니다.

하기 싫어 게을러지고, 억지로 할 수 없이 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교인을 위로해야 할 때, 등 돌리고는 오히려 못되게 굴더니 잘 됐다, 문지방 넘다가 걸려 넘어졌으면 좋겠다고 한 적도 있습니다. 이런 저를 “I know you.” “내가 널 안다.” 인정해 주신다니, “어찌 된 일이지?” 어안이 벙벙해진 제게, 주신 말씀입니다.

“네가 내게 선을 베풀었구나.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손을 내밀어 도와주었구나.

꼭 필요한 그때를 놓치거나, 지나치지 않고, 네 마음, 네 사랑, 네가 내게서 받았던 것 주어 잘 받았다.

그래서 난 너를 안다.

내 나라, 내 아버지의 나라를 네게 허락하노라.”

“제가 언제?”

라 하자,“여기, 내 형제, 곧 예수님의 형제라 했습니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마태 25:40)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 왔는지 생각해 보면, 무섭게 생각했습니다.

‘최후의 심판’ 때에 양, 임금의 오른쪽에 들어갈 수 있도록 온 힘을 다 짜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를 써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오른쪽에 속해야 한다고 믿기도 합니다.

그래서 도울 사람이 없나 하고 찾으며, 선물 보따리 잔뜩 쌓아놓고 기념 촬영하며, 선한 일 했다고 선전하고는, “예수님 날 아시죠?”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해석해 보니,최후 심판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구원할 거리를 찾으려 한 본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양무리에 속할 이유를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내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기 때문에, 사랑, 자비, 긍휼히 여기는 마음, 남을 돕는 마음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악이 들어와 유혹하여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 우리의 태생(胎生)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길 가다가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보면 돕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게 사람의 도리라고 배우기도 했어요.

아픔이 있는 사람에게, 그 아픔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우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울어주려는 자비로운 마음이 우리에게는 다 있습니다.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손 들어보셔요. 한 사람도 없군요.

그럼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기도 모르게,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속에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도와주고, 베풀고, 품어주는 이런 사랑, 배려, 위로, 나눔이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한 번이라도 나누어 보았다는 것이죠. 안 해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예수님께 한 것이라는 말씀 속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에게서 구원받게 할 이유를 찾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13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란 ‘누구에게나’입니다. 구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해당됩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면, 누구나 구원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내 형제라고 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나눈 사람은 누구나 최후의 심판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널 안다”해 주실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저에게는 마태복음 25:40 말씀이 저를 주께서 인정해 주시는 말씀으로 들려,이 한마디, 인정해 주시는 말씀으로, 행복해질 수 있었습니다. 4. 저는 여신현 목사님으로부터 설교를 부탁받고, 제주도 올레길을 걷기 위해 집을 떠났습니다. 길 위에서, 키 큰 아버지와 함께 작은 키의 아들이 손잡고 걸어오는 것을 만났습니다.

자그마한 아들은 아버지의 보폭이 넓은 걸음을 따르느라, 잰 걸음을 바삐 움직여야 했죠. 약간 힘들어하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나에게는 이 장면이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목회일념에 빠져, 아들과 함께 걸어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휴일에는 교회의 여러 행사로 교인들과 함께 지냈지, 자녀들은 아내의 몫이었습니다. 주말은 피 말리는 시간으로, 자녀들과 주말을 즐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아들과 손잡고 걷는 부자의 모습은 제게 부러운 장면이었습니다.

나는 아들이 가까이 왔을 때, 몸을 굽혀 아이의 키에 맞추어 얼굴 앞으로 엄지를 내밀며, ‘엄지 척!’

하며 활짝 웃었습니다. 아이의 눈동자가 커지더니,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 힐끗 아버지 얼굴의 표정을 살피고, 자랑스런 표정으로, 동시에 부끄러움을 탄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숙였습니다.

아버지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어린 아들의 마음이 어떤 것이었을까요?

사실 아버지와 함께 한다는 것, 어린 아들로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 사춘기에 접어든 나이라면, 불만이 찰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하면서, 힘든 올레길 걷는 자신이 인정받고 있음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많지 않습니다.

시편1:6은 “의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도 “내가 너를 안다”는 말은, 인정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인정받지 못할 때, 우리는 살아가는 힘을 얻지 못합니다.

나의 존재감을 뿜뿜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인정받을 때입니다.

학생은 선생님에게서, 교사는 강의를 듣는 수강생에게서, 아내는 남편에, 남편은 아내에게, 자 녀는 부모에게, 부모는 자녀에게서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깨지면, 그 가정은 불화입니다. 관계가 불편해집니다. 신뢰에 금이 가게 됩니다.

인정받는다는 것은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죠.

신앙생활의 은혜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 출세의 자랑? 아닙니다.

마지막 심판 때, “I know you. 아무개야.”

입니다.

인정받음은 사랑받음, 잊지 않음, 잊히지 않고 기억되고 기억함, 나의 소중함을 알아줌, 등등의 소박한 관심, 여기에 행복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God bless you.”

라는 축원의 말을 사용합니다. ‘축복’, ‘bless’의 프랑스어 ‘blessure’는 ‘상처’와 어원이 같습니다.

여기에 어떤 뜻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상처 주길 바란다.” 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너의 상처, 고통, 고난, 아픔의 자리에 함께 하시길 빈다.” 의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축복이라는 것이죠.

바로 여기에 행복이 머물게 된다는 기원이죠.

이 기원이야말로, 내가 예수님의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의 아픔을 나누는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 나는 우리가 복 있는 사람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씀드립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셔요.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으로, 지극히 작은 자, 사람, 자연, 생명 있는 모든 것, 고통받는 것, 아픔이 있는 것, 괴로움과 슬픔으로 절망하는 곳 등등, 그리고 교회를 포함하여, 하나에게 나누는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도움이 필요한 곳에 내가 있게 하는 것이 복이요, 행복입니다. 노르웨이 시인 올라브 하우게(Olav H. Hauge, 1908-1994)는 과수원 농부입니다. 평생토록 척박한 땅에 나무를 심고 가꾸며 시를 썼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시 ‘어린나무의 눈을 털어주다’의 일부 소개합니다. 『눈이 내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춤추며 내리는 눈송이에 서투른 창이라도 겨눌 것인가 아니면 어린나무를 감싸 안고 내가 눈을 맞을 것인가 저녁정원을 막대를 들고 다닌다 도우려고 그저 막대로 두드려주거나, 가지 끝을 당겨준다 사과나무가 휘어졌다가 돌아와 설 때는 온 몸에 눈을 맞는다』이 시에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지요.

아주 작은 일처럼 보이는데, 눈을 털어주는 그 행위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사랑을 나누는 배려하는 마음이, 어린나무의 눈을 털어주는 손길 속에 있습니다. 생명을 살려주는 살림의 손길 나눔입니다.

눈의 무게로 어린나무 가지가 부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눈을 털어주는 시인의 마음이,내가 힘들 때 네가 나를 도와줬다는 예수님께서 “I know you.” 하셨던 그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1. 열린 교회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오늘 정년 은퇴하며 원로장로로 추대되는 황순성 장로님께서, 어떻게 교회를 섬기셨는지 조금 들었습니다. 교회 머슴같이, 어렵고 궂은일을 섬기고 살폈습니다.

청소, 정원 가꾸기, 화장실 청결하게 등등 작은 것 하나부터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저는 황 장로님이 복 있는 사람이구나 생각했습니다.

황 장로님은 예수께서 “I know you.” 인정할 양무리의 본이었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의인’이라 인정하실 복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있는 교회는 어떤 교회라 했지요?

그래요.

복 있는 사람이 있는 교회가 행복한 교회입니다.

열린 교회는 어떤 교회죠?

복 있는 사람이 있는 행복한 교회로군요.

이제 장로님이 은퇴합니다.

그러면 열린 교회에는 복 있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고, 행복한 교회는 끝이 됩니까?

누가 열린 교회를 여전히 행복한 교회가 되도록 해야 할까요?

은퇴하는 장로님의 복 있는 사람의 삶은 교인 여러분에게서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 쳐다보겠습니까?

누가 이어가야 할까요?

여러분이 작은 일 하나에 충성하면서, 복 있는 사람으로 이어가며 살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복 있는 사람이 많이 있는 교회는, 행복한 교회입니다.

저는 축시(祝詩)를 낭독하며, 설교를 마칩니다. ‘열린 교회, 황순성 원로장로 추대 祝詩’ 『갈릴리 호숫가 작은 마을 그분이 설교하실 때 마음이 열린 이들, 갈릴리 나트마한 언덕에 모인 이들 하늘의 말씀 들을 때 삶의 목표가 달라진 이들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마음속에 되새겼던 제자들 처럼 때론 뒤돌아서기도 했고 때론 다투기도 했지만 예수, 그분을 닮으려 그분의 삶 몸으로 산 말씀으로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 어떤 때는 세상의 본(本)이 되었네 원주골 열린 동산 사람이 있었네 그분 닮으려는 사람들이 모여 사랑을 나누었네, 섬김으로, 헌신으로 그들 안에 황순성 장로가 있었네 복된 그곳에! 행복한 열린 교회에!』


강석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