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잘못된 것 보내고, 올곧은 것 맞이함

잘못된 것 보내고, 올곧은 것 맞이함 원문에 실린 그림 또는 사진 1

(送過迎剛 송과영강)

2023년 마지막 날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는데, 인사말 한마디 합니다.

설교하는 강 목사의 신앙이요, 목회이기도 한데, “사랑과 기도와 말씀과 감사로 행복한 우리 집”, ‘집’ 대신에 ‘우리 교회’라 해도 되겠죠.

2024년의 여러분의 가정, 교회가 행복으로 가득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2023년 마지막 날인데, 이날은 누구나 “나는 지난 한 해를 어떻게 살아왔을까?” 스스로 평가하는 날입니다.

어떤 분은 “나는 올해 잘 살지 못했어” 후회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그래, 나는 목적한 바를 이루었어”라고 보람을 느끼며 뿌듯한 심정이 되는 분도 있습니다.

2023년, 여러분 자신은 한 해의 삶을 스스로 어떻게 평하십니까?

사회적으로 보면 그다지 좋은 평을 주지 않습니다.

교수신문이 꼽은 올해의 사자성어(四字成語)를 보면, 견리망의(見利忘義)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로, 견리사의(見利思義)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라’의 반대어가 나라 전체를 채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이익을 보거든 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쳐라” 했지만, 물욕(物慾)에 눈이 먼 세상, 이익만 좇는 세태에서 이런 사람을 찾기 어려운 2023년이라 했습니다.

세상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는, 여러분들은 이런 세상 속에서도 지난 한 해 동안 주님의 말씀을 따르며,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어 탁해진 세상의 물을 맑히는 한 사람이 되었고, 부패하여 썩고 냄새나는 곳에 흔적이 남지 않는 소금이 되어 생명의 기운이 메말라 죽어가는 곳에서 사랑을 나누며 회복되게 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손발이 된 한 해를 살아오셨다고 믿으면서, 다시 한번 더 하나님의 크고 큰 은혜가 여러분에게 가득 채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소리가 조금 전보다 적에 들리는 것은,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는데, 목사님이 너무 과하게 축복하는 것이 아니냐고 여기시는 분이라면, 오늘 자신의 잘못된 것 버리시길 바랍니다.

2.

오늘 밤 자정을 앞둔 시간에, 교회에서는 송구영신(送舊迎新) 예배를 드립니다.

찬송가 554장 1절은 “종소리 크게 울려라. 저 묵은해가 가는데, 옛것을 울려 보내고, 새것을 맞아들이자”하여,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뜻을 잘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옛것을 보내고’에서 ‘옛것’ 속에 보낼 것은 잘못된 것만 보내야 할 텐데, 꼭 지켜야 할 것인데도 ‘낡은 것’이라고, ‘새것’이 좋다고 버리는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새롭다’라고 해서 모두 다 좋거나 선한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새롭고 선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평화를 파괴하고, 사랑의 공동체를 허무는 것이라면,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송구영신(送舊迎新), 이 단어 말고 “잘못된 것은 보내고, 올곧은 것을 맞이함”을 뜻하는 사자성어를 만들어 봤습니다.

‘아니 부(否)’와 ‘바를 정(正)’을 사용하여 송부영정(送否迎正)을 생각하고, 한학(漢學)에 밝은 친구 목사에게 전화했습니다. 친구는 한학(漢學)으로는 ‘바를 정(正)’을 사용하는 것은 윤리, 도덕의 차원으로 급(級)이 낮다고 하면서, ‘허물 과(過), 굳셀 강(剛)’을 추천했습니다. ‘허물 과(過)’는 금방 수용이 되는데, ‘굳셀 강(剛)’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설명하기를, ‘굳셀 강(剛)’ 자는 지조가 곧음을 나타내는 글자인데, 목에 칼이 들어와도 부러지지 않는 금강석(金剛石) 같은 의(義)를 나타내는 것으로, ‘바를 정(正)’보다 훨씬 더 굳건한 옳음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 설교 제목, ‘送過迎剛’(송과영강)이 만들어졌습니다.

3.

여기에서 저는 현재 한국교회의 신앙이 어떤 상태인지를 진단해 보았습니다.

떠오른 성경 말씀이 열왕기 17장과 18장의 사건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 아합왕이 이세벨을 왕비로 맞이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바알을 섬기고 아세라를 섬기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온 땅에 3년 동안 기근이 계속되었고, 드디어 갈멜산에서 가뭄으로 메마른 땅에 비를 내리게 하는 대결이 벌어졌습니다.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 400명, 850명과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 1명과의 대결이었습니다.

결과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들은, 칼로 몸에 상처 내어 피를 흘리며, 큰 소리로 자기의 신을 불렀습니다. 광란의 춤을 추며, 목이 터지라 바알과 아세라를 부르며 “비를 내려주소서” 빌었지만, 구름 한 점 생기지 않고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는 돌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께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으로 주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알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소서,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소서”(왕상 18:36)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죠? 하나님께서는 구름을 보내고 비가 내렸습니다.

3년 가뭄이 해갈됐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관심하는 부분은, 아합왕이 다스리던 시기의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만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알도 섬기고, 아세라도 섬겼습니다.

하나님 섬김의 신앙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다른 우상도 섬겼다는 것은 신앙의 혼합주의, 종교 혼합주의를 말합니다.

이런 때, 갈멜산에서의 여호와의 승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함을 가르친 것입니다. 믿음의 순수성을 지켜야 함을 가르친 사건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기도하면서, “주님, 이 소원 꼭 들어주셔야 합니다. 들어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고서는, 직접 “그러마” 하시는 예수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뭔가 미심쩍고 허전해져서, 절에 가서 부처님께도 “소원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빌고, 그것도 모자라 미아리에 가서 점을 치고 부적을 받고는 “이젠 안심이다. 보험 다 들어놓았으니까” 한다면, 과연 이런 것이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의 한국교회는 신앙의 혼합주의 너무나 심각합니다.

교단마다 나름 각기 다른 신앙의 특색이 없어지고, 어딜 가든지 비슷한 예배, 설교, 신앙생활을 요구하는 교회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무속(巫俗)과의 경계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장로교회인데, 우리 것을 버리고 다른 교파의 신앙을 따른다면, 어떻게 우리 자신을 올바른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1517년 마틴 루터가 불붙인 종교개혁의 불씨가, 제네바의 칼뱅을 거치면서 불길이 되고, 이 불길이 스코틀랜드로 확산하여, 장로교가 정착하게 됩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 교인들이 캐나다로 이주합니다. 신세계로 가서 정착한 것입니다. 캐나다 장로교회가 세워지고, 장로교단이 형성됩니다. 이분들이 한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함경도와 만주 땅, 지금의 중국 연길을 선교지로 삼고, 용정에 캐나다 선교부를 세웁니다. ‘영국 떼기’라고 불렸습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전통이 캐나다를 거쳐 한국에 정착하면서 우리 교단, 기장 교단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신앙과 신학을 알아야 합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장로교회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인 신앙공동체가 지켜야 할 규율, ‘소 요리문답’을 제정합니다. 교회를 다스리는 치리서(治理書)인데, 여기에 오늘의 모든 민주주의 국가들의 헌법 정신을 담아낸 산실이 되었습니다.

‘소 요리문답’ 제1조는 묻습니다.

‘사람의 제 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바로 알고, 삶 전체를 바쳐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 문답을 정리하면,“하나님께만 영광을!”

이라 하겠습니다.

장로교 신앙과 신학의 시작이 “하나님께만 영광을”입니다. 이 신앙을 어디에서 얻습니까?

성경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을 어떻게 나타낼까요?

예배입니다.

그래서 장로교회는 주일을 성수하며 드리는 예배가 중요하고,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 중요한 믿음 생활의 요소입니다.

5.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교회에서 성경 공부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그런 잘못을 행하고 있음을 깨닫고, 성경을 해설하는 책을 집필하여 성경 공부를 하였습니다만, 일반적으로 교회의 성경 공부는 성경 통독으로만 멈추어졌고, 말씀이 주시는 은혜의 깊은 맛을 맛보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에게 물어보면, ‘소 요리문답’으로 세례 교육을 받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소 요리문답’이 무엇인가요? 되묻습니다. 동시에 장로교 정신을 담은 ‘소 요리문답’으로 세례 교육이나 신앙교육을 하지 않고, ‘교회생활 지침서’ 같은, 주일 성수, 헌금 생활은 십일조, 기도 생활, 봉사 활동, 전도해야 한다는 것을 교육하는 것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세례 준비 교육으로 ‘학습’이라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1년 동안 주일 예배를 잘 지키는지 점검하면서, 소 요리문답을 공부했고, 성경 일독은 필수였습니다. 과정을 마치면 당회원들 앞에서 세례 문답을 받았습니다. 교회의 장로 앞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성실히 믿음 생활할 것을 다짐받았습니다.

여러분, 권징(權懲)이란 말 들어보셨나요?

1930년대 교회의 당회록을 보면, 연말에 당회원들이 모여 교인의 신앙생활을 점검하면서 집사가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불러서 권면했고, 신앙생활의 상태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권징한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수찬금지(受餐禁止)라든가, 출교(黜敎)도 있었습니다. 요즘 교회에서 권징하는 당회가 있습니까? 만약 권징의 치리(治理)를 하게 되면, “여기만 교회냐? 다른 교회 얼마든지 있는데” 하며 떠날 교인이 있을까 하여 안 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입구에 ‘신천지 OUT’이라는 팻말을 내걸게 되는 겁니다. 왜 이런 팻말을 붙입니까? 그만큼 우리가 부실하다는 표시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허술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단단히 무장된다면, 신천지 같은 이단 신앙이 틈탈 틈새가 없게 됩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 9절,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믿습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믿으시죠?

그래서 우리가 통성기도를 시작할 때, ‘주여, 삼창’을 하며 “주여! 주여! 주여!”

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받습니까? 그런가요?

바울이 이 말씀만 하셨나요? 바울이 한 말씀을 보셔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롬 12:2)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말씀 공부는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알맹이가 꽉 찬 것이 되면, “하나님 까불면 죽어!”

라는 막말을 듣고도 박장대소하는 타락한 신앙은 결코 자리할 수 없게 됩니다. 복음이 너무나 크게 변질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우리 믿음이 말씀으로 올바르게 채워져야 합니다.

장로교 신앙에서 예배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림”의 집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일 주간의 모든 삶의 행위가 주일 예배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배를 마칠 때 파송사를, 교회에서의 예배는 마치지만 삶 속에서의 예배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말씀도 장로교의 전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입니다.

죄의 회개와 용서가 필요한 우리입니다.

죄의 회개와 용서받음으로 우리는 성화(聖化)됩니다.

우리의 주일 예배가 우리가 성화(聖化)되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주일 예배를 통해, 위로부터 받는 은총으로 지친 삶에 희망과 소망을 얻고, 새 힘을 얻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게 하는 시간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이 예배 시간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6.

박동진 명창이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했던 광고문구가 생각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장로교회가 자기의 전통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오순절 교단의 신앙 양태를 추종하고 흉내 내거나, 의회정치의 기본인 대의정치를 원리로 삼아야 할 장로교회가 가톨릭의 교황 중심이나 감독제도를 따른다면, 장로교 간판을 내리는 것이 옳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장로교의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가 드리는 신앙 행위입니다.

우리가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경건하며 엄숙합니다.

젊은 세대는 고리타분하다고 여길 수도 있고, 우당탕탕 신바람이 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지만, 장로교회 예배의 본질이 엄숙하고 경건합니다.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기에, 사람이 영광을 받을 수 있는 박수의 행위를 삼가게 됩니다.

기도도 예수께서 가르치셨는데,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 네 공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태 6:6)누구에게 보이려는 기도를 말라는 것이죠.

“구제도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태 6:3) 했습니다.

남에게 알리듯 자랑하는 구제를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택한 사도 바울의 말씀도 같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면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데, 그들로 구원받게 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면서,“내가 예수를 본받은 것 같이 여러분도 나를 본받으십시오” 했습니다.

본받는 삶의 내용이, 오늘 함께 나눈 교독문 83번 빌립보서 4장에 자세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다 장로교,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이것들은 버릴 것이 아닙니다.

간직하고, 굳세게 붙들고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신암교회는 새로운 담임목사를 청빙하려 함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장로교의 신앙고백과 신앙, 신학의 전통을 바르게 지키고 가르치는 목사님을 청빙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보문동에 가면 장로교의 전통을 올바르게 지키는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가 ‘신암교회야’라는 이름을 얻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2024년을 이루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파송사 : 2023년의 혼돈의 세상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올곧게 지키면서 살아온 성도들이, 교회에서의 예배를 마치고 2024년의 세상을 향할 때,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제자로 살 수 있도록 함께 하시며 도와주옵소서.


강석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