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 이야기 29

지난 5월 21일에 후배 목사님, 목회와 신학연구소 소장이었던 최영 목사님과 30분간 통화했다. 최 목사님의 부인 장경자 사모가 암으로 투병 중, 5월 4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늦게서야 소식을 듣고, 위로하는 전화를 나누었다.

산책길 이야기 29 원문에 실린 그림 또는 사진 1

최영 목사님의 부친 고(故) 최문환 목사님은 한국기독교장로회 제52회 총회장이었고, 나의 아버지는 제65회 총회장이었다. 그리고 나의 아들 강승구 목사가 목회와 신학연구소에서 기관 목사로 사역했기 때문에, 각별한 마음을 나눈 목사님이었다. 부인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고 들었는데, 어떤 말로 위로한들 위로가 될까? 하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들었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던 중, 최 목사님은 내게, 아내를 떠나보내며 상심(傷心) 중에서 믿음으로 위로와 희망을 얻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최 목사님은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 교수가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예수께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하신 말씀 요한복음 11장 25~26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말씀을 통해 죽음이 부활의 삶의 첫 출발임을 깨달아, 신학적 사고에 큰 변화를 얻게 되었다. 몰트만 교수는 자기의 묘비에 출생일과 함께 사망일이라 쓰지 말고, 부활의 날이라 쓰길 유언했다. 나는 신학자의 유언에서 큰 위로를 얻었다.” 라고 했다. 그리고 아내의 병상 일기를 기록했었는데, 책으로 내어 추모하려 한다면서, 출판되면 보내겠다고 했었다.7월 8일, 최 목사님이 책을 보내왔다. 나는, 최영 목사님이 쓴 “영원으로 비상하다”

‘부활을 기대하며 묵묵히 적은 5개월간의 투병과 간병 일지 Cancer Pilgrim

아내라는 텍스트’를 우편으로 받았습니다.

나는 이 책을 눈물로 읽고 있습니다. 감정이입(感情移入)이 되어, 빠르게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최 목사님의 손녀딸의 물음을 여기에 옮깁니다.

아내가 가장 사랑했던 손녀딸 서현이가 묻는다. “우리는 땅을

딛고 걸어 다니는데, 할머니는 어떻게 저 높은 하늘까지 걸어

가셨을까?” 땅의 중력에 익숙한 다섯 살 아이에게 하늘은 발

을 딛기엔 너무 딱딱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오늘 할머니가 이 땅의 중력을 완전히 벗어났음을 스스로 깨달은 듯했다. 아내의 휴대전화를 보고 서현이가 말했다. “할머니, 핸드폰 놓고 가셨네.” 서현아, 할머니는 이제 하늘에서 어떻게 걸어다니는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할머니는 이제 땅을 딛고 걷는 수고 대신, 고통 없는 빛의 정원에서 천사들과 함께 마음껏 뛰어놀고 계실 테니까, 놓고 간 핸드폰 속에는 우리가 함께한 추억만 남았고, 할머니는 그 추억보다 훨씬 아름다운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가셨단다.

2.

나는 책을 받고, “오늘 아침에 도착한 책 받고‘북쪽에서 보이는 북한산’ 그림을 보내며나의 집, 백련산 숲길 걸으며 쓴 글, 한 편 보냅니다.”2025년 12월에 쓴 시 ‘동병상련’(同病相憐)입니다.

나무들이

그냥 서 있는 줄 알았다.

어느 날

나무들이 내게 말했다.

살기가 너무 힘들어 죽겠어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어

하더니

슬프디슬프게 너무나 서럽게

산책길 이야기 29 원문에 실린 그림 또는 사진 2

우는 것이다.

너무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나도, 사는 게 힘들어 죽겠지만

우는 나무를, 꼬옥

끌어안아 주었다.

나무들이 내게 말했다.

당신 때문에

살았다고,

당신 때문에

살겠다고.

그날 이후

나는 숲속에서

나무들이 나이테 속에 담아 둔

노래를 들었다.

최 목사님은“그림도 멋지고, 시도 너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답신을 보냈습니다. 3.

옥상에 올라, 장마 구름이 가득한 안산 하늘을 한 장 찍었습니다.

하늘은 금방 소낙비를 뿌릴 듯했습니다. 방 안이 너무 습하고 무더워 산책길 나서, 기분 전환하려 했습니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내릴 기세였는데 도, 비가 오더라도 그냥 걷겠다고 마음 먹으 며, 우산 준비 없이 집을 나섰습니다.

홍제천 산책길에 들어서니, 참나리꽃이 반겨 줍니다.

산책길 이야기 29 원문에 실린 그림 또는 사진 3 산책길 이야기 29 원문에 실린 그림 또는 사진 4

홍제천은 북한산에서 한강까지 흐릅니다. 시멘트와 철근으로 세워진 내부순환도로 아 래에서 흐르는 생명의 길입니다. 물고기, 새, 곤충, 여러 종류의 꽃,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갑니다.

나의 산책길은 집에서부터 홍제 인공폭포까지, 왕복 약 4 Km입니다.

오늘 산책길에서 만난 꽃은 참나리꽃입니다.

사실, 최영 목사님의 간병일지를 읽으면서, 감정적으로 힘들었습니다.

나는 최 목사와 5월 21일에 했던 통화 후에, 남편을 떠나보낸 몇 분을 위로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최 목사가 전해준 몰트만 교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슬픔 속에서 자꾸만 주저앉으려는 마음에 일어서게 하는 힘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나는 최영 목사님이 투병일지를 Cancer Pilgrim이라 한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절망의 상황을 순례라 표현한 믿음의 깊이에 경의를 표하는 마음입니다.

떨어지는 굵어지는 빗방울을 몸으로 받으며, 묵묵히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산책길 이야기 29 원문에 실린 그림 또는 사진 5

안식처로 향하는 나를 향해

참나리가

고개 숙여 배웅하는 듯했습니다.

빗방울 맞아 젖은 몸을 씻고

다시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마주했습니다.

4.

멀리 호주에서

존경하는 홍길복 목사님께서, 절묘한 때에

인문학 강의록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보내주셨습니다.

강의록 전문을 그대로 나눕니다. 홍길복(2026. 7. 7)

〈죽음이란 무엇인가〉 여러 해 전 나는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의 명저〈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를 소개하면서 어쭙잖은 잡기장 하나를 썼던 적이 있었다. 오늘의 잡기장〈죽음이란 무엇인가, Death〉 역시 그 책에 버금가는 선풍적 인기를 몰아왔던 아이비리그의 3대 명강의 중 하나이다. 이 책은 예일대학 철학과 교수인 셸리 케이건(Shelly Kagan)이 1995년 이후 예일대학에서 선풍적 인기 가운데 진행했던 공개강좌 〈Death〉를 재구성하여 2012년에 출판한 책이다. 한국어 번역판은 같은 해 박세연 번역가를 통하여 엘도라도(웅진 씽크빅)에서 출판하였다. 오늘 나는 다른 때의 독서 잡기장처럼 이 책에다 밑줄 친 부분들을 직접 옮겨오지는 않고, 이 책의 개관만 간략하게 소개하고, 그 뒤엔 내가 그동안 주변에서 목도하고 써 보았던 죽음에 대한 나의 인문학적 생각을 잡문으로 나누어 보려고 한다.

(1) 이 책은 저자가 〈한국인 독자들에게 보내는 글〉로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 앞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신중해야 하겠지요. 삶의 목표를 세울 때도, 그리고 그 목표를 어떻게 이루어 나갈지를 결정할 때도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누구인지, 주어진 시간은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해 봐야 합니다.〉

(2) 그다음, 이 책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명언을 앞에 싣고 있다.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는 끝나기 때문이다〉 이 구절 역시 케이건이 이 책을 통하여 전하고 싶은 생각을 함축한다.

(3) 저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되게 주장한다.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동안 바로 살고 아름답게 살고 뜻있고 가치 있게 살아야 한다.〉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고뇌하며 죽음에 대한 이론을 펼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 앞에서 오늘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다.

(4) 죽음이란 무엇인가? 의학적으로 죽음이란 하나의 유기체에게 주어졌던 생명이 끊어지는 현상이다. 호흡은 멈추고,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고, 뇌의 기능이 정지되면 우리는 〈죽었다〉 라고 말한다.

(5) 종교와 철학에서는 〈인간의 생명은 유한한 것〉이고 〈인간이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본다. 그러면서 동시에 〈죽음이 있기에 인간의 생명과 삶은 값지고 소중한 것〉이요, 따라서 〈인간은 지금의 주어진 삶에 충실하고 현재의 삶 속에서 의미와 가치를 찿아가야 한다〉라고 말한다.

(6) 죽음은 경험해 볼 수 없는 유일회적 사건이다. 죽다가 살아난 사람은 있어도 완전히 죽고 나서 다시 살아난 사람은 없다. 만약 누군가 완벽하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고 해야 맞다.

(7) 저자는 이 책에서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영원한 삶은 가능한 일인가? 육체가 죽은 후에도 영혼은 계속해서 사는가? 그렇다면 그 영혼은 어디에 가서 사는가? 영혼은 얼마나 오래 사는가? 죽음이란 나쁜 것일까, 좋은 것일까? 자살은 합리적 선택일까, 아닐까?〉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8) 죽음은 첫째, 필연적이다. 모든 유기체는 반드시 죽는다. 둘째, 죽음은 가변적이며 동시에 예측 불가능하다.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지, 언제 죽을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셋째, 죽음은 편재성을 지니고 있다. 모든 유기체는 자기가 죽을 자리나 형태를 알 수 없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자살하는 경우다. 자살은 죽음의 예측 불가능성과 편재성을 거부하는 행동이다. 그래서 자살은 잘못된 선택이다.

(9) 인간이란 어떻게 형성된 존재일까? 몇 가지 다른 주장들이 있다. 첫째는 이원론(二元論, Dualism)이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주장이다. 인간의 몸(Body)이란 육체(Flesh)와 영혼(Spirit)으로 되어 있다는 말이다. 육체가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뇌가 활동하면서 생각, 판단, 결정하며, 희로애락의 감정을 나타내는 동안, 즉 인 간의 육체가 〈살아서 활동하는 동안〉은 영혼도 그 인간의 육체 속에 거하면서 육체와 함께 활동하지만, 육체가 죽고 나면 영혼은 육체를 벗어난다는 이론이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을 중심으로 한 이원론자들의 주장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질문들이 제기되어 왔다.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가?〉 〈육체의 생명이 끊어진 다음 육체를 떠난 그 영혼은 어디로 가서 사는가? 천국인가? 지옥인가? 연옥인가? 아니면 그냥 우주공간 어디인가?〉 〈죽지 않고 영생하는 영혼은 무엇을 하면서 사는가?〉 같은 질문들이 제기되어 왔다. 대부분의 종교는 이 이원론적 바탕 위에서 그들의 신앙과 신학적 이론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사람의 육체가 죽은 후, 그 육체를 떠난 영혼이 어디에 가서 어떤 형태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거하고 활동 하는지에 대해서는 기독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교리가 똑같지 않다. 심지어는 기독교의 성서에도 여러 가지 다른 기록들이 있어서 단순화하기가 쉽질 않다. 둘째는 일원론(一元論, Monism)이다. 흔히 물리주의(Physicalism)라고도 한다. 인간이란 오직 육체 하나로만 형성된 존재요, 영혼이란 없다는 주장이다. 이 책의 저자 케이건은 일원론자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질문이 있다. 〈그럼, 인간들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것은 어디에서 하는 일인가?〉 일원론자들은 말한다. 〈인간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창조하며 파괴하는 일체의 모든 일들은 영혼의 역할이 아니라 정신이 하는 일이다. 그런 것들은 본래부터 육체 속에서 육체와 함께 활동하던 정신의 기능이다.〉 그들은 말한다. 〈육체가 지닌 이런 정신적 기능들은 육체가 죽음으로 더 이상 그 기능을 수행 할 수가 없다. 죽은 자가 어디 말을 하고 생각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육체가 죽으면 정신도 함께 죽는다. 다만 인간의 육체가 지닌 정신이란, 다른 동물들에게서는 찿을 수 없는 〈고귀한 정신으로 이는 사람만이 지닌 것〉이라는 것이 일원론자들의 주장이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일정 부분 이원론적 신앙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인문주의적 생각을 하는 사람이어서, 일원론을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사유에 대해서도 문을 열어두고 대화한다. 서구 정신사에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은 대립도 하지만 피차 타협을 통하여 ‘지양’(止揚, (Aufheben)을 이루어 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죽음에 대해서 기독교는 사실 일원론이나 이원론을 넘어서는 매우 독특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부활 신앙〉이다. 이 〈부활 신앙〉은 종교적 믿음이지 철학적 이론은 아니기에 〈부활 이론〉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셋째, 또 하나의 학설이 있다. 유심론(唯心論, Idealism)이다. 인간이란 처음부터 영으로만 만들어진 존재라는 이론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육신이란 가상적 허구이고 오직 실재하는 것은 영혼뿐이라는 입장이다. 눈에 띄게 현실적으로 나타나 있는 육체와 정신의 실제적 활동과 그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니 일종의 신비주의적 견해라 할 수 있겠다.

(10) 천당이든 지옥이든 끝없이 계속되는 것은 일종의 형벌이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가면 반드시 끝나게 되어 있고 끝나야 한다.

(11) 죽음이 그의 좋은 것들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반대로 살아 있는 동안 좋은 것은 별로 누리지 못하고 나쁜 일만 겪어온 사람들에겐 죽음이란 좋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좋은 것을 앗아가는 죽음은 나쁜 것이 될 수 있고, 나쁜 것을 앗아가는 죽음은 좋은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에 대한 이런 박탈 이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실 죽음은 우리를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하는 축복이기 때문이다.

(12) 우리가 아직 살아 있을 때는 죽음이란 없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죽고 난 후에 찿아오는 죽음이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있던, 죽었던 사실 죽음과는 관계가 없다. 살아 있을 때는 죽음이 없는 것이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3) 죽음이란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죽음이란 우리가 그동안 사용해 온 컴퓨터나 자동차나 냉장고가 고장 나는 것과 흡사하다. 오래 쓰다 보면 고장도 나고 망가져서 못쓰게 되어 버리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 책을 덮으면서 지난날 간접적으로 경험해 왔던 여러 가지 모습의 죽음을 떠올려 본다. 나는 현역 목회 시절에 약 70여 분의 장례식을 집례했다. 100세를 넘겨 돌아가신 분으로부터 임신 7개월 만에 사산(死産)한 아기에 이르기까지 사별한 나이도 각양각색이지만, 사망 사유 역시 참 여러 가지였다. 자연사, 병사, 사고사, 자살, 그리고 한국에서 이곳으로 여행을 왔다가 돌아가신 분의 장례식까지 여러 가지가 섞여 있다.

70년대 초, 서울에서 부목사로 일할 때였다. 어느 날 저녁 한 교우 댁에서 50대의 남편이 곧 숨을 거둘 것 같다는 연락이 와서 즉시 달려가 보았다. 찾아가 보니 이미 숨을 거두었다고 하면서 하얀 천으로 남편의 온몸을 덮어두고 아내는 울고 있었다. 나는 임종 예배를 드리고 통행금지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 내일 아침에 와서 장례 준비를 하자고 말하곤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일찍 그 집에서 연락이 왔다. 죽었던 남편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나는 곧 그 댁을 찿아갔다. 그런데 정말이었다. 그 아저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계셨다. 농담으로 말 하자면 죽은 성도가 부활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우린 사실 삶과 죽음에 대해서 전혀 상식도 없었고 의사의 진단도 없이 우리들끼리 그냥 한 바탕 수선을 떤 것이 아닌가 싶은 일이었다.

1980년대 초엽 호주에 와서 제일 처음으로 경험한 일이었다. 교우 중 한 분이 임신 7개월 만에 아기를 사산했다. 병원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기도해 드렸다. 그 후 병원의 사회복지사(Social worker)가 보자고 해서 그의 사무실로 갔다. 그 직원은 아기의 출생신고서(Birth Certificate)가 필요하니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나는 아기 엄마와 상의하여, 아기 이름을 Carol이라고 짓고 직원에게 알려드렸다. 그 직원은 담당 의사에게 가서 Carol이란 이름으로 된 출생신고서와 함께 사망확인서를 받아 주면서, 장의사를 정하여 장례를 치르라고 말했다. 나는 장의사를 정하고 상의하여 절차에 따라 4일 후 Macquarie Park 공동묘지에 있는 〈어린이 묘역, Children Section〉에서 장례를 치렀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Macquarie Park에 가면 어린이 묘역을 둘러보며 그때 처음으로 치렀던 사산한 아기 장례식을 생각하면서 많은 것을 되새기게 된다. 이는 나의 긴 목회 경험에서, 그전 한국에서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생명의 주인은 누구이고, 왜 인간의 생명은 존엄한 것인지를 배우게 한 소중한 경험이었다.

지금 내 형제는 3남매이다. 나의 4번째 막냇동생은 6.25 후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불과 일주일 만에 죽었다. 그때는 모든 것이 참 어려운 시절이었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당시 열 살쯤 되었을 나는, 아버지, 어머니와 죽은 남동생의 시신을 관도 없이 포대기에 싸서 우리가 살던 영등포구 신길동의 어느 뒷산에 묻었던 생각이 난다, 출생신고도, 사망신고도 없었고, 별도의 장례식도 없었다.

내 여동생의 작은아들, 내 조카는 스물다섯에 세상을 떠났고, 우리 어머니는 98세까지 수(壽)를 누리셨다. 젊은 시절 내 절친 중 하나는 24살에 월남에서 전사했다. 우리 신학교 동기들은 약 30명쯤 되는데 요즘은 1년에 한두 명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 단톡방에는 19명이 남아 있다. 이곳 호주에 있는 이민 1세 목회자들도 1년이면 몇 명씩 제3의 이민을 떠나곤 한다. 몇 년 전에는 나보다 많이 젊은 인문학 친구가 먼저 갔고, 몇 주 전에는 인문학 친구 중 한 목사님의 아들이 겨우 36살인데 세상을 떠났다. 며칠 전 나는 가까운 인문학 친구이기도 한 장로님 한 분이 가족들과 함께 피지로 휴가를 갔다가 그곳에서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올해 76 세시니 매우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연세이다.

아기들은 어미 태에서 나오는 순간, 〈응아〉하고 울음보를 터뜨리지만, 부모와 가족들에겐 웃음을 선사한다. 그런데 죽을 때는 태어날 때와는 상황이 뒤집어진다. 이미 죽은 사람은 하느님의 품에 안겨 평안과 안식을 얻게 되었으니 감사하며 기뻐하겠지만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가족들에게는 슬픔과 아픔이다. 〈자기는 울면서 태어나도 타인들에겐 웃음을 주었던 인간이 자기는 웃으면서 가면서 남의 눈에서는 눈물을 짜내게 하면서 가는 것이 인간이다.〉 살아있는 자들은 눈물 흘리며 슬퍼하고, 숨을 거둔 사람은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이 죽음이 지닌 양면성이다. 그래서 먼저 간 사람들은 아직 살아있는 이들에게 말한다. 〈지금은 모르시겠지만, 당신도 조금만 있으면 내 입장이 될 때가 곧 올 것입니다.〉

다음은 수년 전 돌아가신 이문철 박사가 편집한 작은 책 〈호주 장례 안내서〉의 서문에 내가 쓴 글 중에서 몇 구절을 옮겨온다. 〈봄이 있으면 가을이 있고, 여름이 오면 겨울도 오는 것과 같은 이치로, 출생이 있으면 죽음도 있고, 삶의 기쁨이 있으면 죽음의 슬픔도 있게 마련이다. 사는 것도 그렇지만 죽음도 자연의 순리요, 자연계의 질서 중 하나이다. 삶과 죽음은 피차 꼬리를 물고 순환하는 것이냐, 아니면 일직선으로 흘러가는 일회적인 것이냐 하는 데 있어서 의견을 달리할 수는 있겠지만, 삶이나 죽음 그 자체는 어느 누구도 피하거나 거역할 수 없는 창조주의 섭리 속에 있음이 확실하다. 죽음은 빈부유무식(貧富有無識)을 가리지 않고 찿아온다. 동서고금, 남녀노소, 장유유서를 구별하지 않는다. 죽음이란 지극히 우발적인 것 같이 보이고, 갑작스러운 이변인 것 같이 생각하지만 사실 모든 죽음은 예측이 가능한 것이며 준비하도록 예고된 일정이다. 죽음은 유신론자나 무신론자를 가르지 않는다. 종교적 신앙의 유무나 신앙 형태의 다양성과도 아무 관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찿아온다.〉 〈의학이나 생물학에서는 죽음을 삶의 종결이라고 보지만, 대부분의 전통문화나 종교인은 죽음을 영원으로의 회귀로 본다. 조상에게로 돌아가든지, 신에게로 돌아가든지, 죽음이란 돌아가는 것이지 소멸하여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죽음에 대한 지난날들의 이해와 해석들은 쉼 없이 변하고 있다. 요즘은 〈사망학(死亡學),

Thanatology〉이 학문으로 개발되어서 죽음에 대한 과학적, 의학적 연구만이 아니라 심리학적, 종교적, 사회문화적 접근을 시도하면서 죽음에 대한 다양한 분석과 함께 죽음에 대한 제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죽음에 대한 이해와 접근은 다양하다. 사람마다 생사관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생사관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죽는 것은 똑같다. 수명은 늘어났지만 그래도 죽는다. 장기는 이식할 수 있지만 그래도 죽는다.〉 〈죽음은 개인적으로 경험이 불가능하다. 다만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간접 경험을 할 뿐이지 내가 직접 경험해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죽음은 임상실험을 해볼 수 없는 유일한 분야이다. 죽음이란 유일회적(有一回的)인 사건이다. 그래서 죽음은 신비요, 수수께끼요, 공포와 두려움으로 남게 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은 후에 이름 석 자를 남긴다고 한다. 육신은 죽어서 자연으로 회귀하고, 몸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한 사람의 삶의 흔적은 오랫동안 남게 된다. 그러므로 살아 있을 때 잘 사는 것이 사실은 잘 죽는 것이다. 죽음의 준비란 “지금 여기에서, Here and Now” 하루하루 사는 삶의 내용이 결정해 준다.〉

〈호스피스 운동을 포함한 “죽음을 준비하는 학교”는 단순히 묘지를 미리 준비하도록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매장, 화장, 수목장, 암장, 동굴장 등등 장례 방법을 소개하거나 유언 작성법을 배우고 비문을 미리 써 두는 공부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루하루의 삶을 반성하고 남은 인생은 어떻게 하면 좀 더 뜻있고 바르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하게 하는 곳이다. 죽음에 대한 가장 좋은 준비는 오늘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것이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 나오는 모리 슈워츠(Morrie Schwartz) 할아버지처럼, 아직 살아 있을 때 사랑하는 친구들과 같이 자신의 장례식까지도 미리 치러 두는 여유 있는 삶, 생각하는 인생,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 모든 주어진 것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삶이 바로 죽음에 대한 가장 좋은 준비가 되리라.〉

  • 추가로 추천하는 책 : 1) 〈인문학으로 읽는 기독교 이야기〉 손호현 지음, 동연, 2015 판 중 〈제10장 메멘토 모리〉

-이 책은 시드니에서 저와 함께하는 〈목회자 인문학 교실〉의 주교재로 사용하고 있음. 2) 〈죽음의 신학〉 김균진 지음, 대한기독교서회, 2002. (끝)


강석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