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산책길 이야기 25
- 등록일
- 2026년 5월 4일
- 작성일
- 2020년 12월 5일
길
1.
이야기를 펼치기 전에, 써두었던 글을 찾았습니다. 7월 25일에 쓴 글이죠.
연세대학교에서 윤동주 기념관을 새롭게 단장하고, 윤동주 가족을 초청하여 먼저 보여주는 행사였는데, 처사촌 동생인 윤인석 교수가 가족 중 몇 명의 육성을 녹화하여 자료로 영구 보관하려는데, 나보고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혹시나, 한마디 하라 하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생각하면서 짧은 글을 준비했어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면서, 그냥 준비한 말 읽겠어요.
저는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 여사의 막내딸 오인경의 남편, 윤동주 시인에게는 조카사위인 강석찬 목사입니다.
올 1월에 어떤 사람이 윤동주 서시를 인용한 뉴스를 들으며 쓴 글입니다.
“또,
동주의 서시를 인용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단다
그런데 지금까지
동주의 서시를 인용한 사람 중에
부끄럼 없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동주의 시는
저울추다
말한 자의 무게를 달아보게 하는
저울이다
동주의 삶은
맑음을 재어보는
잣대다.” 윤동주 시인은,역사의 고난, 민족의 고통, 자신의 슬픔을십자가를 지는 사랑으로 산,생명의 시인입니다.
윤동주 시인은,어둠이 짙을 때 별이 되고,땅에 매여 사는 사람들에게 하늘을 열고,길을 잃은 이들에게 길을 보여 준,이 시대뿐만 아니라영원토록 꼭 있어야 할사람이죠.
연세대학교가시인을 세상에서 잊히지 않도록 기리는 일을 해 주시어,유족들로는 한계가 있고, 할 수 없는 일을 해 주시니그냥,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윤동주 시인을 짧은 글 속에 담을 수 없지만,시인의 시와 삶을 함축하려고 고심했죠.
그의 시가 ‘길을 잃은 시대나 사람에게 길이 되었다’라는 것은 확실하다고 믿어요.
2.
연희동을 떠나 홍은동으로 이사를 하고 나니 산책길이 달라졌습니다. 달라진 산책길 이야기를 나누면서 ‘길’을 주제로 정했죠.
윤동주의 ‘길’에 대한 시 두 편을 인용하여, 달라진 길을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1938년 5월 10일, 21살의 윤동주의 삶이 반영된 시죠.
시인의 삶이 밝은 빛을 드러냅니다.
봄기운이 가득 찬 길, 햇빛, 바람, 건강한 새순의 활기 넘침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이랬던 시인은 1941년 9월 31일에 길에 대한 또 하나의 시를 남깁니다.24살의 시인은 우리 민족이 겪는 고난을 가슴 찢어지게 아파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길 힘들어하는 시인을 만납니다.
길을 잃었는데, 길을 걸어야 하는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길을 잃었던 때가 있었던 나도 시 속에 있습니다.
시인은 돌담길을 걸어야 하는 자신 건너편에 만나야 할 또 한 사람의 자기가 있다고 합니다.
그를 만나야 하기에, 오늘 돌담길을 걷는다고 합니다.
얼마나 숙연한지 모르겠어요.
‘길’을 읽으며, ‘새로운 길’과는 다르게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길’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길에 대한 두 시는 ‘길’을 썼지만, 전혀 ‘다른 길’입니다.
전혀 다른 삶의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었기 때문이죠.
나는, 시인의 두 시를 비교하면서‘집이 달라지니 길도 달라지더라’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삶의 자리가 달라지면, 길이 달라지죠.
달라진 길이라도 걸어야 삽니다.
3.
그런데!11월 29일 아침에 선배 목사님의 전화를 받았어요.
“윤동주 때문에 우울증 걸렸다”라는 말로 대화가 시작되었어요.
“?” 놀라운 마음으로 “왜?” 묻지 않을 수 없었죠.
내게 들려준 선배의 이야기는, 선배 부인이 노인 돌봄 요양원에서 봉사하는데, 윤동주 시인의 ‘길’의 앞부분을 외워 들려주었답니다.
“길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했더니, 듣고 하는 말이 “치매 노인네 이야기네!?” 이었답니다.
“빵!” 그럴 수 있지요.
이렇게 들을 수도 있군요.
그렇죠?
나이 들어, 깜빡이 경험을 가져보았다면, 무릎을 칠 것입니다.
“그곳이 어디였지?” “왜 내가 여기에 온 거야?” “왜 내가 여기에 있어?” “잃어버린 그것이 뭐지?” “왜 기억이 안 나? 답답해.” 손에 들고 찾고, 눈에 안경을 쓰고서 안경을 찾는 건망증 경험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요?
까마귀 고기를 먹고 깜빡깜빡하는 기억력 때문에 절망하기도 했죠.
그래서 우울증 이야기가 시작이었다고 생각했죠.
물론,윤동주가 잃어버린 길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지만,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로 웃을 일 잊은 날이 길어지고 있었는데눈물을 찔끔거리며 웃었습니다.
물론, 우울증은 아니었죠.
하, 이렇게 윤동주는 웃음도 주는군요.
늘 심각하게만 느꼈던 그가 말입니다.
4.
예수님의 길을 생각해 보았지요.
예수님은 세상에 “은혜의 해를 선포하러 왔다”라고 하셨죠. (눅 4:18-19)제자를 부르고 “나를 따르라”하며, 앞서 걸었습니다. (마 4:19)이 걸음을 세례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 했습니다. (요 1:29)예수님은 자신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라고 하셨지요. (요 14:3)아버지께로 가려면, 길인 자신을 밟으란 말씀이지요.
길인 자신밖에는 구원의 통로가 없다고 하셨어요.
예수님은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내가 갈 길을 가야 한다”라고(눅 13:33) 하셨는데, 공동번역은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에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로 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2:27에서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하십니다.
같은 내용을 마태복음 26:39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 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십니다.
이런 기도 내용으로 판단하면, 예수님의 뜻은 십자가의 잔이 지나가는 것이었으나, 결국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 길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길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희생이요, 사랑이라 고백합니다.
물음이 생깁니다.
만약 예수께서 “내 뜻대로”의 길을 걸었다면? 겟세마네의 기도대로 이 잔을 지나가게 하는 걸음을 걸었다면? 아버지인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자기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고 불편하셨을까?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차질이 생겼을까요?
아니라고 믿어요.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의 결정에 대하여 “네 결정이 내 뜻과 같다”라고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떤 결정이든지 같았을 것입니다.
그래야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교회의 고백이 성립되는 것이죠.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세상 모든 아버지의 마음도 그렇지 않던가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왜 있겠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길은 자신의 결정이었고,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기도 합니다.
이 예수께서 우리들의 길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어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새로운 길 앞에서,예수를 믿고 따르는 길을 새겨봅니다.
강석찬 목사